[동인문학상] 1월 독회, 본심 후보작 심사평 전문

이영관 기자 2023. 1. 1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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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54주년을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 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과리·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최근 월례 독회를 열고 작년 8~9월에 출간된 소설 작품들을 검토했습니다. 1월 독회의 추천작은 모두 3권.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김병운), ‘습지 장례법’(신종원), ‘아버지의 해방일지’(정지아)입니다.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소설가 김병운 /민음사
습지 장례법
소설가 신종원
아버지의 해방일지
소설가 정지아 /강민구씨 제공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과리·문학평론가

정과리 문학평론가

◊김병운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김병운의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은 이제 소수자의 삶을 공정하게 대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논의할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1980년대 후반부터 큰 의제의 성격을 가지고 폭발한 성평등에 대한 의론들은 요 근래 몇 년 사이에 성소수자에 대한 담론으로 급격히 발전하였다. 짐작컨대 성소수자에 대한 자각과 인정의 수보다도 그 수량이 훨씬 많았다. 그렇다는 것은 성소수자 쟁론에 상당히 많은 외부자들이 참여했다는 것을 가리키는데, 거기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함께 있었다.

긍정적인 면은, 성소수자 문제가 궁극적으로 성평등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면, 이는 성소수자의 인권이 인류 전체의 공통의 과제라는 점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그 논의에 동참했다는 점이다. 즉 성평등은 저 옛날 생명들이 성선택을 한 순간에 작동한 원리, 즉 생명 다양성이 진화적으로 적합하다는 원리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이니, 이를 외면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이로써 우연적인 것 혹은 비규범적인 것의 발생에 대한 적극적인 인정과 그 효과에 대한 유의가 적절한 과학적 관점이라는 새로운 이론 패러다임이 담론적 우위성을 가지고 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문제는 고착된 원칙주의가 사회를 압박하는 정도가 유달리 심한 한국 사회에서는 진지하게 계몽되어야 할 사안이기도 하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도 만만치 않게 증식하였다. 무엇보다도 이를 말초적 호기심의 사안으로 접근한 시각들이 유무형의 상업적 활용으로까지 발전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 사건들이 활개치는 걸 보고 있자니, 차던 혀가 소태 씹는 상태로까지 이르게 되는데, 필자의 감정은 뒤에 둔다 치고, 소수자의 문제는 그 무엇이든 디테일의 개별성과 정확성이라는 기준을 통해서 다양성과 평등의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 각별한 중요성을 띤다고 할 수 있다.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의 주 인물들은 바로 이런 문제들을 폭넓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접근한다. 거기에는 성소수자 의제를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스트레이트’에게 “어째서 당신이 우리의 스피커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있고, 그 물음은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기만 하면, 선의와 정치적 신념을 담보하기만 하면 당신의 발언은 정당해지는가. 당신이 성소수자를 도구화해서 재생산한 편견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지는가”라는 의혹으로 발전한다. 다른 한편, “당사자성이 결코 발언의 자격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20쪽)는 태도를 함께 갖춤으로써, 성소수자 자신의 내부에 도사린 욕망의 내용과 결과 수량을 꼼꼼히 헤아리는 태도를 진지하게 수락한다. 그럼으로써 이 두 가지 양극의 푯대를 사이에 두고 얼마나 많은 분기와 얽힘이 발생하는지를 넓게 아우르면서, 때마다 다른 의미와 질감으로 다가오는 것들을 면밀히 주목하면서, 그것들을 종합할 수 있는 덩굴을 찾아간다.

이러한 시각의 폭, 즉 열린 정도와 개별 사안들에 대한 촘촘한 눈길을 통해서 성소수자 문제가 아주 주밀하고도 핍진하게 묘사되고 있다. 이 사실성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문학과 예술에 있어서의 리얼리즘은 ‘사물에 대한 정직성’에 다름 아니라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이 소설집의 최고의 성취라고 할 만하다. 이것은 흔히 리얼리즘에 따라 붙는 췌사, ‘사회적 전형의 창출’이라든지, ‘진보하는 세계의 충실한 반영’ 등등의 헛껍데기 같은 명령어들을 단박에 의심하고 걷어차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니 무엇보다도 이른바 ‘팩트’에 접근하는 일의 자세를 독자에게 일깨워주니까 말이다.

◊신종원 ‘습지 장례법’

신종원의 ‘습지장례법’은 유령의 집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책을 펼치면 엽기 장례를 치르는 광경이 격하게 묘사된다. 뭐가 엽기란 말인가? 잘 알다시피 문학에 비유법이란 게 있다. 장미로 미인을 비유하고, 주가 급등을 쇠뿔로 비유한다. 여기에서는 분묘를 늪지에 비유했다.

비유는 장식이 아니다. 원본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늪지에 비유했더니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난다. 가문의 모든 조상들이 저승에 들어가지 못하고 늪에 빠져 죽은 시체로 켜켜이 쌓여 있는 것이다. 온전히 삭지 못한 채로 너덜너덜한 수의들과 썩어가는 살점들이 질척한 흙탕물을 뚝뚝 흘리며 역한 냄새를 풍긴다.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은 얼마나 향기로운가? 반면 이 늪지대는 구토를 유발하기만 한다. 뜬금없이 왜 이러나? 조상들이 도솔천을 건너지 못하고 거기에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한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 가문을 못 잊어서, 자손들을 가문의 영광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한국인의 이름은 대개 석 자이다. 그런데 그중 두 자는 가문과 그 안의 위계를 가리키는 데 쓰인다. 한 자만 오로지 자기 것이다. 이렇게 한국인은 문벌에 매여 있다. 유독 족보를 따지는 게 한국인이다. 그래서 작가는 가리킨다. 한국인들은 구천에서 우글거리는 유령들에 꼼짝없이 포박되어 있다.

저 옛날 이상(李箱)은 자신의 천재가 개화하지 못한 한 가지 이유로 “혈청의 원가상환을 요구하”는 가문의 기대를 지목한 적이 있다. 실로 식민지 현실은 조선인들을 일본의 노예로 만든 것만이 아니다. 쇠망한 왕조에 대한 미련을 습성으로 만들어주기도 했다. 정말로 해야 할 것은 개명된 자주 독립 국가였는데 말이다. 그 결과 지금까지도 퇴락한 유습들이 우리의 정신을 지배한다. 사색당쟁의 그 더러운 싸움질까지도.

그러나 작가는 할아버지를 사랑한다.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를 보살폈던 일들을 잊을 수가 없다.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이 처참한 모습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를 사랑한다면, 고이 보내드려야 한다. 저렇게 구천에서 망령춤을 추시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작가는 말한다. 이건 한갓 유령의 집일 뿐이야. 놀이공원에 있는 그 가건물이야. 어서 이걸 깨부숴버리자. 독자여, 망치를 들어라.

◇구효서·소설가

소설가 구효서/김연정 객원기자

◊김병운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김병운의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은 잘 읽힌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이 말을 트집 잡고 싶어서다. 잘 안 읽힐 줄 알았니? 라며 꼬집으려고.

고백하자면 그렇다. 어딘가 다를 거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낯설어서 읽는 재미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다르고 낯선 것들이 잘 읽힐 리 없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잘 읽히지 않더라도 다르고 낯선 것을 권장하고 높이 사니까 읽을 만한 것이 된다.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 중 한 편의 예외도 없이 게이를 화자로 하고 있지 않은가. 소수자의 서사가 다수자에게 ‘그냥 잘’ 읽힐 수는 없는 거라고 여겼다. 어쩌면 그래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신기한, 다른, 희한한 것을 보고 재미있어 하거나 배우거나 이해의 폭을 넓히거나 하려고. 그런데 김병운의 단편들은 쑥 잘 읽히고 만다. 하나도 안 아픈데 어딘가 된통 얻어맞은 것 같다. 이게 김병운 식의 ‘다른’ 펀치인가? 읽는 내내 즐거웠다.

성적 정체성 문제를 떠나 모든 소수자의 고민은 소수자이기 때문에 떠안게 되는 것 말고는 다수자와 다를 바가 없다. 부동산을 매매하거나 빚에 쪼들리는 등의 고민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소수자이기에 떠안게 되는 고민마저도 고민하는 방식 심정 언어 역시 다를 바가 없다. 다를 바 없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게 김병운의 소설이다. 낯설 게 없으니 쑥 잘 읽힐 수밖에 없다.

낯선 걸로 치자면 여자와 남자만한 게 있을까. 오죽하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고 했을까. 그런데도 잘 산다. 차이와 낯섦이 어려움의 본질이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화성에서 온 사람끼리가 더 낯설지 않고 금성에서 온 사람끼리가 더 다르지 않을 텐데 둘의 관계에 사랑애(愛)를 붙이면 사정이 돌변한다. 역시 성적 소수자가 겪는 어려움의 본질도 성 그 자체에 있지 않다는 얘기다. 그러니 고민하는 소수자의 모습이 고민하는 다수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을 수밖에 없고 김병운의 소설이 잘 읽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지아의 소설이 사람 앞에 붙은 빨갱이라는 관형사를 떼어내는 작업이기도 했다면 김병운의 소설도 게이라는 관형사를 떼어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 떼어냄의 의미를 따져볼 수도 있겠으나 얼마나 잘 떼어냈는지도 보아야 할 터, 대나무 속 흰 막처럼 얇고 매끄러운 문장으로 얼마나 깔끔하고 참하게 떼어내던지 사람의 섬세한 신경다발이 투명하고 화려하게 드러날 뿐 퀴어 소설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정도다.

그렇게 잘 쓰니 잘 읽힐 수밖에 없는 것일 텐데, 쓴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에 잘 놓인 것도 다름 아닌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이며, 소설은 모름지기 그렇게 놓이고 놓여야 하는 사물이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알고 공감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모르는 사람,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사람 앞에도 진실 되게 놓일 수 있는 것이 소설이라는 장르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묘하다. 읽는 내내 웃음을 참을 수 없다. 등장인물이든 작가든 독자를 웃기려 작정한 게 아닌 듯한데도 그렇다. 아버지 장례 치르는 얘기인데 웃길 리 없지 않은가. 웃기려 작정하기는커녕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를 찾기 힘든 유형의 무겁고 지난한 한 생애를 고스란히 싣고 있다. 당면한 주인공의 죽음은 물론 한때 주인공의 동지라고 불렸던 참혹한 죽음들이 생생한 장면으로 지나가는가 하면, 제대로 비통해 할 수조차 없는 속박의 삶을 70여년이나 견뎌온 내력을 담고 있다. 그리하여 장례식장에서 웃다 소스라치게 표정을 수습해야 할 때처럼 독서 중에 저도 모르게 비어져 나오는 웃음이 멋쩍고 얼마간은 부끄러워진다. 그러다 금세 또 웃는다. 이 웃음의 정체가 묘해서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묘하다고 한 건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를 읽는 이들의 느낌이 대체로 그러할 것이다. 일부러 웃기려 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작가도 어느 정도는 독자의 반응을 짐작했을 테고, 어쩌면 작가 자신도 작품을 쓰면서 쓰디쓰게 웃었을 것이다. 오래 삭혀서 웃음으로 발효되어 버리고 만 쓰디씀.

발효라고 했거니와 그것은 유기물이 분해되는 시간을 요하는 작용이다. 작가와 독자, 즉 상주와 조문객의 장례식장에서의 웃음을 용인하게 하는 첫 번째 효소도 세월이라 불리는 시간이지 않을까. 그리고 가장 잘 익은 때를 놓치지 않고, 떫지도 시지도 않은 맞춤한 단술을 한 눈에 척 알아보고 꺼내 놓는 장인의 눈썰미가 두 번째 웃음의 요인이지 않을까. 그것이 술이든 빵이든 아무도 탓하지 않을 맛을 빚는다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할 만큼 어려운 일인데 정지아는 그것을 능청스럽게 해낸다. 그나마도 술 담그기 어려운 엄혹한 세월 한 가운데서. 아마도 독자들이 이 땅의 긴 격동의 시간을 아버지와 작가와 함께 구르며 관통해 오지 않았다면 웃음은 설익어 조롱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읽으며 웃고 있는 자신의 웃음의 가치를 일깨운다.

일평생 빨갱이나 빨치산이라는 관형어 없이 존재할 수 없었던 아버지를, 그가 죽고 나서야 아버지를 ‘그냥 사람 아버지’로 부르는 딸의 비애가 웃음에 탁 쏘는 쓴맛을 더한다. 이념형 인간을 오히려 자임함으로써 당국의 감시와 고립책에 고집스레 대항하긴 했으나 딸의 가슴에 남은 그의 음성이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였을 만큼 실제로는 가족과 이웃, 이 땅의 사람들을 염려한 소심하고 요령 없는 아버지였다. 딸에 의해 관형사 없는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비로소 한쪽 편에서 정교하고 완강하게 규정한 강제표준어 ‘빨갱이’가 아니라 한 사내며 못 말리는 아버지였던 구례의 ‘뽈갱이’ 고상옥으로서 화장장의 연기처럼, 생전에 즐겼던 담배연기처럼 모든 오라에서 농담처럼 자유로워진다.

268페이지에 이르는 추도사로 장례를 잘 치러 아버지를 영원한 해방구로 보내드렸으니 새해부터는 어쩐지 작가의 작품이 전혀 새로워질 것 같아 기대가 크다.

◇이승우·소설가

소설가 이승우/ 오종찬 기자

◊김병운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김병운의 문장은 모호하거나 불분명하지 않다. 모호한 상황에 대해 말하거나 불분명한 감정에 대해 말할 때도 그는 모호하거나 불분명하지 않은 표현을 구사하려고 애쓰고, 끝내 성공한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으면 상황의 모호함이나 감정의 불분명함이 모호하지 않고 불분명하지 않게 받아들여진다. 그 때문에 논리적이고 직접적이기도 한 그의 문장은 때때로 수필처럼 받아들여진다. 독자가 허구의 서사 양식인 소설에서 이런 느낌을 갖는다는 것은 그의 서술 전략이 성공적이라는 걸 뜻한다. 소설가에게는 자기가 지어낸 허구의 이야기가 실제 일어난 일인 것처럼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김병운의 소설에서는 이런 작가의 의지가 꽤 많이 느껴진다. 모든 소설의 화자가 1인칭 ‘나’인 점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실제 있었던 일인 것처럼 읽히기를 바란다는 것은 실감나게 읽히기를 바란다는 뜻일 테고,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경험한 것이다.’라는 식의 화자의 자의적인 제스처는 실은 트릭일 가능성이 크다는 걸 우리는 알아야 한다. 성 정체성과 관련된 갈등을 겪고 있는 그의 인물들의 이야기가 작가의 경험인 것처럼 ‘실감나게’ 읽힐수록, 그에 비례하여 그의 트릭이 그만큼 정교하다는 의견도 생겨난다.

김병운은 한 인물을 이해시키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여럿 동원하여 증언하게 하는데, 이는 그가 주로 다루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시각을 의식하는 데서 말미암은 신중함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는 화자가 한 영역에 함몰되지도 않고 도외시하지도 않는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뜻이다. 함몰이든 도외시든 공감에 다다르기 어렵다. 그의 특별한 이야기들은 항상 보편 정서를 환기하는 데 성공한다. 거기에 이 서술의 자리가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현대사의 비극이 어떤 지점을 비틀어, 뒤엉킨 사람들의 인연이 총출동한 자리. 이 소설의 화자가 이렇게 표현한 이 자리는 화자의 아버지 장례식장이다. 말 그대로이다. 한때 빨치산이었고 마지막까지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굴곡진 현대사의 기억들, 예컨대 ‘뒤엉킨 사람들의 인연들’이 불러 나온다.

굴곡은 사연들을 만들고 그 사연에 참여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한두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무늬를 만든다. 이해는 하지만 받아들이지 못하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지만, 없는 채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사연의 굴곡이 심할수록 마음의 무늬는 더 복잡하고 요란해진다. 말하기 힘든 것, 말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복잡한 마음은 아주 잘 다루지 않으면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다. 서툰 작가는 쉽게 한쪽으로 기운다. 예컨대 분노하거나 체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건과 인간을 납작하게 만든다. 치우치지 않은 시선으로 시대와 인물들의 다층적인 면모를 생생하고 세세하게 그려내고 있는 이 소설이 반가운 이유이다.

균형 잡힌 시선은 역사나 이념이 아니라 그 시간에 참여한 ‘사람’들을 제대로 보게 한다. 이 효과를 키우기 위해 작가는 자기를 비하하는 화자를 등장시킨다. 화자의 자기비하적 서술은 아마 객관이 아니라 균형을 위한 장치였을 것이다.

독자의 공감과 감동은 화자를 따라 일어난다. 화자인 아버지의 딸은 지나간 시간의 기억들이 불러내지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그동안 이해하기는 했으나 받아들이지 못했거나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받아들여야 했던 아버지를 비로소 제대로 본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 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작가 스스로 ‘지난 세월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라고 밝히고 있거니와, 아버지와 아버지 세대에 대한 참회의 기록처럼 읽히기도 한다.

질기고 질긴 마음들, 얽히고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세대 사람들의 마음을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고 말한다. 그 무겁고 무서운 마음들을 무겁지도 무섭지도 않게 전하기 위해 작가는 얼마나 고심했을까. 작가의 그 마음이 고마웠다.

◇김인숙·소설가

소설가 김인숙/이명원 기자

◊김병운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어떤 이야기는 낮고 조용할 때 오히려 단단하게 들린다. 한마디, 한마디 힘껏 고른 단어와 문장들, 그리고 행간. 마침내 이야기. 김병운의 소설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에 실린 7편의 단편 소설 속 이야기들은 너무나 조용해서 그냥 스쳐 지나가는 풍경처럼 읽힌다. 그러나 몇 걸음 지나고 나서는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뒤에 남겨진 그 풍경과 소리가 무엇이었던지를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런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한 번일 때는 너무 조용해서 듣지 못했으나 소리가 쌓이자 이야기가 되어 단단히 중심으로 내려앉는다. 그래서 김병운의 소설들은 겹으로 생각해야 하는 이야기들이기도 하고, 그래서 내게는 그의 소설들이 ‘소설 속 화자의 말’처럼 퀴어 소설들로만 읽히지는 않는다.

이번 소설집 속에서 가장 눈에 띄는 단어는 ‘우리’다. 표제작인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에서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제 얘기예요. 우리 얘기지.” 또 다른 소설 ‘윤광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우리를 외면하지 않는다면.” 이 문장들을 있는 그대로 해석한다면 김병운의 소설 속 ‘우리’는 퀴어들이다. 그러나 이 문장이 독자들에게 전해지면 ‘우리’의 폭이 확장된다. 전이되는 것이 아니라 확장된다. 위에 인용한 문장 속 ‘우리’는 ‘그들’일 뿐만 아니라 ‘나’이기도 하다는 당연한 사실이, 함께 나누지 못한 온갖 개인적인 서사와 함께, 큰 소리로 말하지 못해 머뭇머뭇 속삭이지 않을 수 없었던 내 사연들과 함께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차별, 소수자, 공동체 이런 다소 거창하게 여겨지는 단어들을 걷어내고 나면 오롯이 ‘나’, 모두가 모두에 대하여 당사자일 수밖에 없는 개인이 남는다는 것. 퀴어들만이 화자로 등장하고 앞으로도 그러한 소설만 쓰겠다고 소설 속 화자가 다짐하는 김병운의 소설이 ‘우리’에게 미덕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 소설들이 ‘우리’를 지나 내게로 향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다릴 때 우리가…’는 김병운의 첫 소설집이다. 수록작 단편 소설 ‘어떤 소설은 이렇게도 끝난다’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내가 무슨 수로 알겠니, 나한테는 절대로 말을 안 하는데.” 청각장애자였던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어머니가 하는 말이다. 절대로 안 하는 말, 그러나 실은 못 하는 말들에 대해 김병운은 쓰고 있다. 반면 독자들은 안 듣는 말, 못 듣는 말에 대해서 읽게 되는데, 그 말들을 문장으로 전하는 김병운의 안정감이 든든하다.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빨치산의 딸’로 잘 알려진 작가 정지아의 입담은 이번 소설에서도 여실하다. 빨치산의 딸인 화자와,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철 지난’ 빨치산인 부모 사이의 이야기. 결국 시대와 역사의 이야기일텐데, 온갖 질곡과 부당함과 참혹함으로 가득차 있는 우리의 현대사를 되새겨볼 때, 지나간 시대 혹은 현 시대의 이야기가 소설 속에서 이토록 재미있다는 것이 가당한가 하는 질문이 들 정도로 이 소설은 유쾌하다. 정지아가 농담을 아는 작가여서만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진저리나는 현실이라 하더라도 그 중심을 꼿꼿이 응시할 때 생기는 올곶은 시선과 긍정의 힘, 이것이 전달될 때 농담과 냉소의 차이가 생긴다고 한다면, 이 소설 속 정지아가 유지하고 있는 유쾌함의 힘은 바로 그것일 터이다. 앞서 소설 속 부모를 ‘철지난’ 빨치산이라고 말하며 이런 표현이 가능하겠는가라고 썼으나, 한번 더 생각해보면 가능한 표현일 리가 없다. 지나간 시대가 남긴 흔적들은 역사 속에서 어떻게든 반복된다는 의미에서 하려는 말이 아니다. 문학이 살려내는 것은 결국 사람의 일. 그 사람을 만든 시대, 그 사람이 만들어간 시대, 그러므로 사람이 살아가는 한 등 뒤에 짊어졌다가 앞으로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그런 것들. 그저 살아가는 일들. 그런 것들은 어떻게 해도 ‘철지난’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오늘 날, 난데없이, 지금 갑자기 왜 빨치산인가 하는 질문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빨치산으로 살았고, 그로 인해 옥고를 치렀으며, 그럼에도 그 정신을 잃지 않고 살았던 한 사람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로 이 소설을 읽는다면 그 질문은 타당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삶을 회상하는 또 하나의 시선, 그 삶을 부정했다가 긍정했다가, 마침내 자신의 삶으로 끌어안는 화자의 시선으로 들어가면 이 소설은 시대를 떠나, 혹은 시대를 넘어 삶을 걸어가는 소설이라 하겠다. 삶을 걸어가며 만났던 온갖 순간들의 이야기. 그래서 때때로 처연하고, 유쾌하게 웃을 때도 입술을 깨물게 하는.

◇김동식·문학평론가

김동식 문학평론가 /김연정 객원기자

◊김병운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김병운의 소설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에 수록된 대부분의 작품들은 성적 소수자와 관련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성적 소수자를 문학적 관습으로 활용하거나 문화적 아이템으로 소비하지 않으면서,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성적 소수자의 일상적인 생활과 고민을 정갈한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표제작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은 남성 동성애자 독서 모임에 함께 참여했던 소설가 윤범과 배우 주호에 대한 이야기이다. 독서모임은 비슷한 삶의 궤적을 거쳐 온 남성 동성애자들이 직접 만나며 서로 위안과 소속감을 나누어 갖는 장소였다. 독서모임이 게이 정체성에 확고한 근거를 두고 있었던 데 반해서, 주호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이 일시적인 동성애자와 양성애자를 거쳐 무성애자로 옮겨 왔음을 밝힌 바 있다. 주호는 윤범과는 예술을 매개로 해서 친한 사이가 되지만, 양성애자에 대한 묘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독서모임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 이후에도 게이 소설가인 윤범과 무성애자 주호는 간간이 만남을 갖는데, 그 과정에서 윤범은 주호를 게이로 분류하고자 하는 의지를 무의식적으로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호의 성적 정체성을 무성애자로서 인정하지 않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소설은 단순히 성적 소수자들 사이에서도 비가시적인 억압과 배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문제는 정체성에 대한 해석과 태도이다. 정체성은 확고한 것이며, 그 확고함에 근거할 때 정체성은 안정적으로 소통될 수 있으며, 확고한 정체성의 상호소통에 근거할 때 동질적인 집단 또는 공동체의 유지가 가능하다는 생각. 정체성에 고정된 사고는 사회 일반에서나 또는 성적 소수자 사회에서나 차별과 억압과 배제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킨다. 성적 소수자 그룹 내부에 드리워져 있는 억압과 배제의 논리를 성찰하는 차이의 윤리학,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이 들려주는 말들이다. 김병운의 작품이 동성애 소설의 경계를 스스로 넘어서면서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열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보작으로 두고 다시 읽어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도, 이 부근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신종원 ‘습지 장례법’

솔직히 말하면, 죽은 조상을 늪에 수장하는 관습을 1000년 동안 지켜 온 가문이 존재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다. 신종원의 장편소설 ‘습지 장례법’에 의하면, 영산 신씨의 시조이자 고려시대의 인물인 신경은 기도 끝에 나라를 구할 힘을 얻었고 그 대신에 자손들이 죽을 때가 되면 늪에 돌아와 수장한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조부의 사망으로 가주(종손)가 된 주인공이 조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늪을 찾았고, 늪은 주인공을 당신이라고 부르면서 1000년 역사를 가진 가문과 조상들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려준다. 주인공이 관심을 가진 조상으로는, 한국전쟁에서 이념의 희생양이 되었던 사람들, 신씨 가문을 떠나서 레닌의 러시아혁명에 참여한 여성, 조선시대 붕당정치의 억압을 버티며 살아갔던 사람, 고려 말 신씨 집안의 서자로 태어나서 울분 속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조부는 습지 장례의 규율을 이어나가길 바라며 주인공에게 종가의 고택과 늪을 상속했지만, 주인공은 죽어서 늪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다. 주인공은 이 늪에 수장되지 못한 사람들 또는 족보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여성들을 떠올리며, 조부의 장례가 끝날 무렵에 늪지를 불태운다. 가부장적인 가문의 규율에 대한 단순한 반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늪은 1000년 동안의 반복을 통해서 모든 죽음들을 동질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 죽음들 속에는 가문의 규율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차이와 기원을 삶 속에 도입하고자 했던 몸짓들이 가로 놓여 있다. 조상과 나의 삶과 죽음에 기입된 반복과 차이의 운동성을 확인하고 긍정하고자 하는 음악적 글쓰기가, ‘습지 장례법’에 드리워진 근원적인 욕망이 아닐까 한다. ‘습지 장례법’은 늪에 드리운 안개처럼 인물이나 배경도 분명하지 않고, 몽환적인 문체는 줄거리 파악에 애를 먹게 만든다. 아마도 소설의 일반적인 재미를 찾는 독자에게는 추천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가문의 규율을 늪에 수장하고자 하는 주인공의 모습처럼, 소설의 일반적인 관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가고자 하는 몸짓이, 책장을 덮고 나서도 눈앞에 어른거렸다. 후보작으로 선정한 이유이다. 어쩌면 늪이 가져온 환각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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