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라면 하나 끓여 드셔 보세요
머리가 아프고 어지럽다는 증상을 주소(主訴)로 60대 초반의 여성분이 진료실에 찾아오셨다. 고혈압·당뇨와 같은 다른 만성질환이 없는 분이었고, 이미 대학병원 신경과에 진료예약을 해 놓으신 상태라 진료의뢰서가 필요해서 오셨다고 했다. 아무리 진료의뢰서만 받으러 오셨다지만, 증상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신경학적인 이상은 없는지, 통증은 어떤 양상인지 확인하고 써 드려야 하는 법이라, 나는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증상이 시작되었어요? 환자분은 잘 기억하지 못했다. 혹시 최근에 생활습관이 바뀐 게 있나요? 그제야 6개월여 전에 남편이 만성 신부전으로 저염식을 섭취하기 시작하면서 자기도 저염식으로 식사를 바꿔 드시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어차피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은 자신이니, 자신이 먹을 일반식과 남편이 먹을 저염식을 둘 다 준비하는 것이 힘들기도 하고 또 저염식이 몸에 좋다고들 하니, 남편의 만성 신부전을 일으킨 고혈압도 무서워지던 판국에 고혈압도 예방할 겸 저염식을 남편과 함께 먹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인가, 점점 몸에 기운이 없어지고, 머리가 무거워지고, 만성적인 두통에 시달리게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설 때마다 핑하고 도는 느낌이 드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팔다리에서는 힘이 빠지고,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무거워져서 꾸준히 하던 운동도 못 할 지경이 되었다. 혈압이 너무 떨어져서 생긴 일이었다. 게다가 저염식은, 솔직히 맛있지 않으니 입맛이 점점 떨어져 체중이 빠져가고 있었기에, 전신적인 컨디션은 바닥을 치는 중이었다.
진료실에 들어오실 때 혈압을 체크했었지. 혈압이 조금 낮기는 했어도 심각하게 낮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 방문한 의료기관에서 소란스러운 대기실에서 혈압을 쟀을 때 이 정도라면,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이분의 혈압은 훨씬 낮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라면을 하나 끓여서 드셔 보시죠?”
나는 라면을 처방했다. 꼭 라면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냥 짭짤한 음식의 대명사처럼 라면이 떠올랐다. 라면은 6개월 동안 한 번도 못 드셨다 했다. 라면을 집 안에서 끓이면 너무 냄새가 많이 나니, 혹시라도 남편이 못 먹어서 속상해할까봐 라면을 안 먹었다. 라면이고 칼국수고 떡국이고, 국물이 먹고 싶어지는 요리는 가능하면 하지 않았다.
나는 적절한 수준의 염분 섭취가 오히려 낮은 혈압을 올려 적절한 컨디션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며, 라면을 끓여 드셔보시라 했다. 라면을 드셔보고 컨디션이 좋아지는 느낌이 드는지 한번 보시라고.
주치의는 앵무새처럼 ‘짜게 드시지 마세요. 기름진 음식을 드시지 마세요’라는 말을 무작정 외우는 사람이 아니다. 환자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생활의 변화를, 건강 상태에 영향을 미칠 만한 변화를 같이 찾아내고, 개개인의 상태에 맞는 적절한 조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주치의이다. 그러니 주치의가 주치의답게 일하려면 충분한 진료시간이 보장되어야 하는 것은 필수라고 하겠다.
정신건강의학과에는 10분의 시간 단위로 나뉘어 상담료가 만들어져 있고, 이는 충분한 상담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과 의사들에게 모두 좋은 일이 되었다. 어려워지고 있는 소아청소년과를 구원할 방법도, 충분한 시간 동안 상담이 이루어질 경우 그 시간을 인정해주는 방식의 수가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소아청소년과뿐이랴, 1차의료에서 주치의로 활동하고 있는 모든 의사들은 환자와 관계를 맺고 환자를 알아갈 충분한 시간을 바랄 것이다.
그분은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서 먹고 발걸음이 갑자기 가벼워졌다고 했다. 몇개월 동안 무거웠던 머리가 다음날 바로 개운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아침에 벌떡 일어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가끔은 라면이 필요한 분들도 있는 법이다.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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