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내게도 다 계획이 있어요

차경애 KBS 아나운서 2023. 1. 1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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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경애 KBS 아나운서

안식년에 뭐 하세요? 사람들이 묻는다. 기생충의 기석이에게만 계획이 있는 게 아니다. 내게도 다 계획이 있다. 난 무슨 일을 하든 준비하고 계획을 세우는데 꽤 익숙하다. 퇴직 후의 계획도 10년 전부터 세웠으니까. 혹자는 말한다. 계획을 세우는 동안 주변 환경이 다 바뀌어버리는 속도의 시대에 무슨 계획이냐고. 그러나 계획을 세우고 자료를 모으고 그 계획이 이루어질 걸 상상하면 행복하다. 물론 계획을 세우더라도 계획대로 다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계획의 절반만 해내도 만족이다. 계획을 세우는 과정이, 그걸 상상하는 시간이 즐겁기 때문이다. 설사 계획한 대로 되지 않더라도 괜찮다. 수정하면 된다. 조금 느리게 가면 된다. 난 지금 안식년의 시간이지 않은가.

오래전부터 서재의 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책 욕심이 많아 결혼 전에 읽었던 책도 부산 이삿짐에 잔뜩 실어 왔었는데 꼭 필요한 스피치 책과 아끼는 시집, 어린 왕자 등 몇 권만 남기고 과감히 버렸다. 그리고 그 빈자리엔 안식년과 퇴직 후 할 일에 대한 자료들로 채우기 시작했다.

안식년이 시작된 10월, 부산은 영화의 바다였다. 계획한 대로 매일 한편씩 다큐를 중심으로 11편의 영화를 봤다. 87년간 물질을 한 현순직 상군해녀의 이야기 ‘물꽃의 전설’, 화산연구를 평생 하다가 화산 현장에서 죽음을 맞이한 카티아와 모리스 부부의 다큐 ‘사랑의 불꽃’ 등 사람들의 다양한 삶에 나의 삶을 반추해 보기도 했다.

또 3박 4일 혼자 여행을 하면서 나만의 시간도 가졌다. 경주 단석산을 마주하며 방송생활 38년을 돌아보고, 명상 바위에 앉아 앞으로의 시간을 그려보았다.

강의도 들었다. 요즘 지차체에서는 무료로, 실비로 여는 강좌가 많은데 평생학습관에서 배운 포토퍼니아, 글그램으로 지난 성탄절과 새해 카드를 만들어 지인들에게 보냈다. 이뿐만 아니라 캘리그래피, 정리수납 등 배움의 계획도 하나씩 실천했고 가장 걱정했던 김장의 계획은 가족의 큰 박수 속에 김치냉장고를 가득 채우게 되었다. 난생처음 담가본 김치, 그것도 겨울 농사라는 김장을 30kg이나 했다. 동영상을 보며 지인의 도움을 받아 백김치까지 담그니 한겨울이 든든하다.

그런데 안식년의 가장 중요한 계획은 나만의 대동여지도를 만드는 거다. 분류한 파일에는 지역별로 그곳의 역사와 음식, 볼거리 등의 자료를 모았는데 특히 그 지역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에 대한 기대가 크다. 경남에 가면 나를 아나운서로 뽑아주신 사장님을 만나고 싶다. 1985년 최종 면접시험 이후 한 번도 뵌 적이 없지만 “사장님! 저 이제 퇴직합니다. 제가 KBS에서 아나운서로 일할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드리고 싶다. 40년 가까운 세월, 연세도 많으시고 또 속세를 떠나 스님이 되신 후라서 만나주실지 모르겠지만 그분과의 만남을 상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리고 서울에 가면 기상전문기자였던 이찬휘 선배를 만나고 싶다. KBS에 입사해 고정 프로그램으로 가장 먼저 한 방송이 일기예보였는데 아침뉴스에서 2~3분의 날씨 방송을 하기 위해 새벽 4시에 출근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현재는 기상캐스터라는 분야가 독립돼있지만 그 당시에는 아나운서가 날씨 방송을 했다. 새내기 아나운서였던 내게 기상도를 읽는 법, 원고 작성법 등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다. 선한 웃음이 인상적이었던 선배. 만나면 함께 많이 웃을 것 같다.


경북에 가면 KBS 동기인 친구를 만날 거다. 여러 어려움으로 사표를 내고 경북 영주에 내려와 살고 있는 친구, 직종은 다르지만 수습사원 연수원에서 언니처럼 나를 챙겨주었던 친구, 각자 부산과 서울에서 워킹맘으로 바쁘게 살다 보니 연락이 끊겼었는데 어느 날 사표를 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불편했었다. 이번엔 내가 먼저 꼬옥 안아줄 거다. 이 친구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눈물이 난다.

이렇게 안식년 석 달 동안 계획대로 진행된 일, 그리고 수정하며 바뀐 계획들, 또 앞으로 진행될 2023년의 계획! 난 오늘도 그 계획에 대한 기대와 상상으로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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