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그라든 마이너스통장… 알고보니 은행의 ‘꼼수’

류재민 기자 2023. 1. 11. 03: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대출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신용점수 높은데 축소

10년 전부터 한 은행의 마이너스통장을 써온 50대 회사원 이모씨는 최근 은행 콜센터로부터 “마통 한도를 4000만원에서 3000만원으로 줄이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작년에도 5000만원에서 4000만원으로 줄였는데 또 줄이겠다고 했다. 이씨는 “신용도나 소득은 그대로인데 비상 상황을 대비해 만들어 놓은 마이너스통장 한도를 일방적으로 줄인다고 하니 납득이 되질 않았다”고 했다. 그는 은행 측에 “정 그렇다면, 한도를 축소하는 이유를 서면으로 보내달라. 카카오톡으로라도 보내라”고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은행 측은 “한도를 그대로 두겠다”고 물러섰다고 한다. 그는 “한도를 꼭 줄일 필요나 원칙이 없다는 것 아니냐. 이래도 되는 거냐”고 했다.

그래픽=백형선

30대 직장인 정모씨는 지난달 은행으로부터 “8000만원인 마이너스통장 한도를 20% 줄이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정씨는 한도를 유지하기 위해 마이너스통장에서 당장 필요도 없는 돈 7000만원을 대출받아 다른 통장에 옮겨놓았다. 대출 이자로 약 10만원을 냈다. 그는 “이자 10만원을 수수료라고 생각하고 냈다. 울며 겨자 먹기처럼 억지 대출을 받은 셈“이라고 했다.

대출 폭증이 문제였던 2021년 은행들이 금융 당국의 권고로 시행한 마이너스통장 한도 축소가 대출이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이어져 고객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초저금리에 ‘빚투’(빚내서 투자) 등이 겹치며 가계대출이 폭증하자 금융 당국은 2021년 은행들에 대출 증가를 억제할 것을 주문했었다. 대출 줄이기가 어려웠던 은행들은 마이너스통장 한도를 줄이는 방법으로 대출 증가세를 통제했는데, 대출 감소로 총량제가 사실상 없어졌는데도 계속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은행마다 “마이너스통장 한도 축소”

마이너스통장은 금리가 높지만 급전이 필요할 때를 대비해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쓰지 않고 한도만 잡아두는 경우도 많다. 은행들은 언제 마이너스 대출이 나갈지 모르기 때문에 자금을 준비해 두어야 하고, 그 한도만큼은 대출을 내준 것으로 집계한다. 은행들은 2021년 대출 총량 규제 때 이렇게 잡아 놓은 한도를 줄여 대출 증가세를 통제했다. 은행마다 약간 차이는 있는데 보통은 전혀 쓰지 않을 경우 매년 20%, 한도의 10% 정도인 소액을 쓰면 10% 정도 줄이는 식이다.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마이너스통장 잔액은 2019년 말 41조원에서 2021년 3분기 49조원으로 최고치를 기록한 이후 2022년 8월 45조로 떨어졌다. 계좌 수 역시 2020년 말 312만 좌에서 2022년 8월 300만 좌로 줄었다.

그러나 올해는 사정이 달라졌다. 시중 금리가 급등한 탓에 가계대출이 줄어들자, 금융 당국은 작년 말부터 은행들의 대출 총량을 규제하지 않고 있다. 은행권의 가계 신용대출은 2019년 말 234조원이었다가 2020년 말 266조원, 2021년 3분기엔 282조원까지 늘었지만 이후 금리가 올라가면서 지난해 3분기 기준 265조원으로 오히려 감소했다. 마이너스통장 한도 축소의 명분이 사라진 셈이다.

대출을 억누를 필요성이 사라졌는데도 은행이 ‘안 쓰는 마이너스통장’ 한도를 자꾸 줄이는 이유는 결국 수익성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소비자가 마이너스통장 한도만 받아놓고 쓰지 않을 경우 이자가 발생하지 않는 상태로 돈만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은행들엔 손해다.

◇”급전 대비한 최후의 보루까지 뺏나”

은행들은 이미 도입한 제도를 한 해 만에 또 바꾸면 혼란이 생길 수 있다고 해명한다. 금융 당국도 손을 놓고 있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은행들이 대출 조건을 정하는 것까지 당국에서 일일이 개입할 수는 없다”며 “게다가 고금리 시대에 가계부채가 늘어나는 현상이 좋다고 보긴 어려워 굳이 은행 관행을 바로잡을 요인이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사이 불어난 대출로 막대한 이익을 남긴 은행들이 자금 경색으로 힘든 시기를 겪는 소비자들의 고충을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미 상환 여력이 입증된 대출자에게 은행들의 한도 축소로 대출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는 합리적이지 않다”며 “지금처럼 금리가 높은 상황에서는 필요한 사람이 필요할 때 원활하게 자금을 조달할 환경을 만들어주는 유동성 문제가 더욱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