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이 안개처럼 덮쳤다 걷혀…항해는 인생 축소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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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소설집 '일각고래의 뿔'(강 펴냄)을 낸 유연희 작가를 만난 직후 '일각고래'를 검색해봤다.
웬만한 자연 다큐멘터리에서도 보기 힘들었던, 실존 동물인 일각고래를 유연희 소설가는 어떤 뜻으로 작품의 중심에 슬쩍 들어앉혀 놓았을까? 한국 어느 항구에서 한때 위법을 불사하며 고래를 잡았던 시절, 고래잡이의 핵심 인력인 황포(황 포수의 준말)는 동료 두 사람과 함께 일본으로 여행을 가장한 도피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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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번째 소설집 ‘일각고래의 뿔’
- ‘방랑하는 뱃사람’ 등 6편 수록
- 바다 소재로 삶의 끝없는 환기
네 번째 소설집 ‘일각고래의 뿔’(강 펴냄)을 낸 유연희 작가를 만난 직후 ‘일각고래’를 검색해봤다. 있다! 이런 고래가 있었나? “북극에 사는 고래의 어금니가 상아처럼 길게 튀어나온 것이라고 했다. 북극 고래는 유빙을 뚫어 숨을 쉬고 먹이를 잡고 적을 물리치니 어금니를 작살처럼 변형시킨 것이란다.”(수록작 ‘일각고래의 뿔’ 중)
웬만한 자연 다큐멘터리에서도 보기 힘들었던, 실존 동물인 일각고래를 유연희 소설가는 어떤 뜻으로 작품의 중심에 슬쩍 들어앉혀 놓았을까? 한국 어느 항구에서 한때 위법을 불사하며 고래를 잡았던 시절, 고래잡이의 핵심 인력인 황포(황 포수의 준말)는 동료 두 사람과 함께 일본으로 여행을 가장한 도피에 나선다. 법령을 안 지키며 고래를 잡던 일에 탈이 났기 때문이다.
근데 행선지를 정하고 보니, 목적지 근처인 구마모토엔 지진이 났다. 어떻게 할까? 에라! 가자. 어차피 “우리가 가는 곳은 불의 고리와는 반대편”이다.
그때의 황포를 작가는 이렇게 묘사했다. “바다에서 날고 기는 황포가 고래 수염판에 걸러진 부유물처럼 육지에선 묘하게 겉도는 것 같았다.” 황포는 헷갈린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가 오늘 나가사키에 있을 줄 몰랐다. 나의 미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작살은 내게 고래의 이빨과 같다. 짐승의 생존 도구, 고래의 이빨.” 지진이 기어코 스며든 일본의 여행지에서 일행은 가게에 덩그러니 전시된 실제 일각고래의 뿔을 만난다. 황포는 속삭인다. “어찌하여 너는 지구 반대편의 이 먼 나라, 작은 항구까지 흘러와 뿔 하나로 이리 누웠느냐.” 그렇다면 황 포수자신은?
1956년생 유연희 작가는 한국의 중진 해양소설가이기도 하다. 소설집 ‘일각고래의 뿔’에 실린 단편 6편의 특징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바다·여행·삶이 따로 놀지 않고, 해양이라는 대상이 소재가 되는 데 그치지 않고, 끝없이 우리의 삶을 환기한다. 바다·여행·삶이 겹치고 포개지는 그 면적이 이 작품집에 실린 단편소설이다. 또한, 좋은 예술작품의 기능 가운데 하나는 우리에게 우리 삶을 문득 환기해주는 일이다.
수록된 단편소설은 간결하다. 애써 에돌아가지도 않고, 많이 설명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작가는 작중 인물의 말을 빌려 이렇게 토로한다. “하긴 내가 모르는 게 그뿐인가.”(‘마지막 테라스 만찬’ 중) 작가는 섣불리 속단하지도 않는다. ‘손가락 꺾기’의 주인공은 곤경에 처한 남성이다. 그는 다짐한다. “두어 달 병원에서 쉰 후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것이다. 갈 곳은 바다뿐이었다.” 갈 곳이 바다뿐인 내성적인 그는 자기 손가락을 꺾는 과격함을 불쑥 보여준 뒤 마지막 임무라도 수행하듯 큰 어려움에 처한 다른 가족을 돕는 의협의 행동을 보인다.
‘방랑하는 뱃사람’은 매력 높은 해양 단편소설로 다가왔다. 장성한 아들 덕을 보나 했더니, 난데없이 아들이 거대 권력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 바람에 뱃사람 ‘강’은 돈을 벌려고 또 배를 탄다. 젊은 조타수가 함께한다. 오키나와 근처였다. 젊은 조타수가 외친다. “저거 보세요. 저거. 안개가 막 걸어와요.” ‘강’은 안개와 싸우며 배를 몬다. 드디어 안개를 벗어난 것 같다. 젊은 조타수가 외친다. “와, 우리가 이겼어요.” 과연 그럴까? 바다가 그리 단순한가?
‘강’이 다시 안개와 절망에 휩싸일 무렵, 배에 아들의 이메일이 도착했다. 그 편지 속에 갈매기 날갯짓 같은 희망이 슬쩍 보인다. 삶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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