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해온 것들을 기어이 지키려는 몸짓, 얼마나 아름다운가[공감의 건축-또 다른 건축을 향해]
1935년 지어진 서울 적산가옥
주민들이 직접 꾸리는 카페로
한국의 문화소비 성지로 뜨거운 서울 성수동. 그곳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LCDC서울은 1년 전 개장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화제다. 자동차 정비소와 구두 공장을 특색 있는 상점들로 만드는 데 공간 브랜딩, 건축, 인테리어, 조경 등 국내 유명 디자이너들이 합심했다는 이유가 크다.
그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1층 카페 이페메라는 ‘힙한’ 성수동의 보통 카페와는 다른 모습이다. 지금 한국에서 카페는 단순히 커피를 파는 곳이 아니라 공간 디자인의 최전선을 가늠하는 척도다. ‘월간디자인’이 발표한 ‘2022 한국 디자인 연감’의 공간 디자인 작업 상당수가 카페였던 만큼 내로라하는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카페 디자인에 몰두하고 있다.
카페 이페메라는 최근 상업 공간을 압도하는 인더스트리얼 디자인 흐름이나 레트로 열풍을 살짝 비켜간다. 알루미늄, 철과 같은 금속재료를 사용한 매끈하고 차가운 디자인, 공연 무대처럼 연출적 요소가 두드러지는 디자인 흔적을 여기서는 찾기 어렵다.
임태희 디자이너는 목재를 사용한 ‘건축적 가구’를 주제로 이곳을 설계했다. 의자와 테이블뿐만 아니라 벽면도 가구처럼 제작해 유기적으로 연결했다. 카페의 테마인 우표, 티켓, 도서관 카드처럼 일시적(ephemera) 용도를 위해 만들어진 아름다운 지류들을 담는 틀을 하나씩 짜 맞췄다. 마치 흥성했던 벨 에포크 시대의 느긋한 도시 풍경을 떠오르게 하는 고전적인 디자인이다.
빠르면 6개월도 넘기지 못하고 새로 짓는 국내 인테리어 시장에서 이곳이 살아남아 10년 가까이 지속되길 바란다는 임태희의 말은 흥미로웠다. 창 하나 없는 미니멀한 입방체를 가뿐하게 받친 모습으로, 노르스름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카페 이페메라는 공업단지 성수동에 따스한 숨결을 불어넣었다.
건축 역사 연구와 디자인 실천
임태희는 건축에서 가장 트렌디한 분야인 상업 공간 디자인에서 주로 활동한 중견 디자이너다. 카페 이페메라를 비롯해 고창 상하농원 인테리어, 온양민속박물관 카페온양 등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그의 최근작이다. 작가 김범, 건축가 정재헌 등과도 협업했으며 건축과 실내공간을 아우르는 작업들을 진행해왔다.
일본에서 수년간 살고 공부한 그는 교토공예섬유대학에서 건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역사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이 공존하는 교토에서의 건축학도 생활은 삶과 작업의 자양분이 되었다. 그는 건축사학자 이시다 준이치로 교수의 지도 아래 일본 근대건축의 보존과 활용에 관한 박사논문을 썼다. 박사과정 중 근대건축 연구와 실천에 앞섰던 일본 사례들을 국내 건축학회지에 게재하기도 했다.
2007년 졸업 후에는 서울로 돌아와 임태희디자인스튜디오를 설립했다. 가까운 과거인 근대에 대한 역사적 관심과 이를 보존하고 활용하는 실천인 ‘리노베이션’은 그의 중요한 작업 주제가 됐다.
또한 임태희는 유학시절 구마 겐고, 이토 도요 등 세계적인 일본 건축가들을 인터뷰했다. 지금처럼 쉽게 해외 정보를 즉각 얻기 힘들었던 시절, 잡지사 해외 통신원으로 활동하며 일본과 한국 현대 건축의 가교 역할을 했다. 그 대표적인 성과로 도쿄 올림픽 주경기장 설계자인 구마 겐고의 저술을 번역하여 국내에 처음 소개했다. 그는 구마 겐고의 <약한 건축>과 <자연스러운 건축>을 번역했고, 다수의 구마 겐고 한국어판 책의 감수를 맡았다. 역사적, 이론적 토대가 깊은 학구적 건축가 구마 겐고의 말과 글은 임태희를 자극했다. 구마 겐고의 말처럼, 그도 건축의 강함을 경계하고 자연과 공존하는 태도를 중요하게 여겼다.
일련의 연구와 실무를 통해 임태희는 자연스럽게 역사 인식을 숙고하는 디자이너가 됐다. 이때 역사는 거창한 담론보다 이미 과거부터 존재해온 것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세우는 일에 가깝다. 세대로 이어지는 전통 의식을 탐구하며 자연스레 한국 공예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사무실을 연 지 10년 정도 됐을 무렵 그는 사계절 변화가 또렷하게 보이는 양재천변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이후 ‘계단집’(2019), ‘광주시민회관’(2020), ‘을지다락’(2020) 등 근대 건물 리노베이션 작업들이 연달아 주어졌다. 도시재생 정책으로 오래된 공간의 리노베이션 기회들이 전례없이 쏟아지던 시기였다. 이것들은 그간 임태희디자인스튜디오가 수행해온 작업들과 다소 성격이 달랐다. 하지만 그가 유학시절부터 연구한 것들을 실천하고 건축가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작업이었다.
‘상상의 보존’회현동 계단집
남산 아래 회현동에 자리한 계단집은 서울시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2019년 완공된 8개의 서울역 앵커시설 중 하나다. 서울역 앵커시설은 서울로7017에 맞닿아 있는 회현동, 서계동, 중림동 일대에 지역 주민과 방문객 편의를 위한 거점 시설을 조성하는 계획이다.
계단집은 원래 1935년 완공된 것으로 추정되는 적산가옥이었다. 임태희가 설계한 이곳은 현재 서울도시재생 사회적협동조합의 관리 아래 지역주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카페로 사용되고 있다. 임태희는 옛집에서 무엇을 남길지 질문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남길 대상은 골목 초입에서 경사진 집을 연결하는 묵직한 돌계단이었다. 이제는 이런 돌을 구하기도, 그처럼 다듬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계단집이라는 카페 이름도 바로 이 돌계단에서 왔다.
집에 대한 자료가 전무했지만 일본 근대건축을 공부한 임태희는 자연스레 그곳에서 다다미방이 있는 20세기 초반의 일식 가옥 형식을 떠올렸다고 한다. “방의 배치는 곧 그 집이 간직한 기억”이라고 믿는 그는 평면 구조를 무리하게 변형하지 않았다. 개구부 높이는 이 집이 적산가옥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단서였다. 이 또한 최대한 유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리노베이션했다.
대신 비교적 건축에서 자유롭게 조직되는 입면은 새롭게 디자인했다. 이렇게 집의 원질서를 최대한 지키는 과정을 임태희는 “상상의 보존”이라고 설명했다. 쉽게 사라지는 과거의 물리적 공간을 기필코 남기려는 의지가 담긴 표현이다. 연구에 기반한 나름의 객관적 기준을 가지고 복원이 아닌 적극적인 보존을 한 셈이다.
계단집은 같은 시기 개장한 서울시 전체 앵커 시설 중 지금도 매우 활발히 운영되는 곳에 속한다. 맛집 가이드 블루리본 서베이의 2023년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계단집의 성황은 이례적이다. 개장과 동시에 코로나19가 닥쳐 운영이 어려웠던 데다 도시 재생이라는 명분만으로 지속적인 방문을 끌어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그곳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노력과 열정 덕분이지만 상업 공간 디자인으로 갈고닦은 임태희의 감각도 한몫했다. 공공건축 과정에서 내부 공간은 대체로 소홀하게 다뤄진다. 한정된 예산을 건축 골격과 외관을 만드는 데 쓰고 나면 내부 공간은 최저가 입찰로 거칠게 진행된다. 그러나 계단집은 임태희가 직접 사람의 손길이 닿는 가구와 집기들을 상업 공간 수준으로 밀도있게 디자인했다. 오래된 집에 놓인 현대적인 가구들은 사용자가 커피를 즐기는 행위에 집중하는 시간을 제공하는 장치였다.
서울 을지로에 있는 을지다락은 민간 프로젝트지만 작업 개념은 계단집과 유사했다. 코로나19 때문에 운영이 멈췄지만, 다양한 협업자들과 을지로 풍경을 지키고자 했던 작업이다. 임태희는 지역 연구를 통해 남길 것을 먼저 고민했다. 을지로 골목 자체가 보존할 가치가 있었기에 을지다락은 기존 입면을 최대한 유지해 이 건물이 거리에 자연스레 녹아들도록 했다. 실내 공간에는 을지로를 대표하는 여러 산업 재료들을 수집해서 그 물성들을 잘 보여주는 집기들을 넣었다.
‘무엇을 남길까’ 질문에서 출발
골목 초입서 이어지는 돌계단
가옥 역사의 단서인 문 높이 등
원래 모습 그대로 ‘상상의 보존’
빠르게 짓고 부수는 흐름 저항
거대 흐름 제어하는 적정 속도 디자인
임태희의 작업은 이처럼 원래 그곳이 담고 있는 시간과 맥락을 최대한 이식시키는 데 집중한다. 이런 이유로 정확히 뭘 새로 디자인했는지 모르겠다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그는 자기 작업이 주인공이 되기보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매개체가 되길 바란다. 빠르게 철거하고 새로 짓는 건축 행위를 개인이 제어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작업은 그 속도를 조금 늦추려 애쓴다.
실제 임태희가 작업한 공간은 들어가서 그냥 지나치지 않고 천천히 음미하도록 발걸음을 붙잡는 것들이 많다. 신체와 직접 닿는 손잡이, 의자, 테이블과 같은 가구들과 그가 신중하게 배치한 공예 소품들이 사용자를 머물게 한다. 이런 섬세한 건축 행위들은 건물의 뼈대가 할 수 없는 공간의 흐름을 바꾼다. 개발시대 지역과 도시 계획으로 뻗어나가 재빠르게 몸집을 키웠던 건축의 실천 범위는 이제 실내 공간과 가구 같은 작은 단위로도 수렴되고 있다.
건축과 인테리어 디자인 업역의 경계가 흐려지는 지금 적정 속도와 규모의 작업을 찾는 일이 중요해진다. 어떤 속도로 갈 것인지에 따라 내가 인식하는 바깥 풍경이 달라진다. 속도를 조금 낮추면 주변이 해상도 높게 들어오며 거기 무엇이 남아있는지 알게 된다. 느리게 간다고 해서 건축이 향하는 목적지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임태희는 작고 약한 건축의 고유한 속도가 지닌 힘을 믿는다.
내부는 현대적인 가구로 채워
이용자가 커피에 집중하게 해
과거·미래가 만나는 공간 완성
회현동 계단집을 둘러보고 서울역 쪽으로 걸어가는데 마침 간판을 내리고 영업을 종료한 힐튼호텔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 최고의 재료와 기술로 풍요로운 공간감을 선사했던 건축물이 철거를 앞두고 있다. 최초 설계자가 누군지도 모르는 1930년대의 일식 주택과 1980년대 유명 건축가가 지은 현대 호텔의 어긋난 운명이 교차한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보고 경험한 건축물 중 얼마가 미래 세대에 전해질까? 아이들이 기억해야 할 가까운 과거의 공간 유산들이 조용히 사라지는 가운데 무언가를 기어이 보존하고 남기려는 몸짓은 얼마나 위태롭고 아름다운지. 정치와 자본을 비롯한 건축의 외연들이 다그치는 거대한 흐름을 지연하는 방법을 상상하는 게 앞으로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디자인 사고가 아닐까.
■정다영
정다영은 건축과 도시계획을 전공했다. 건축잡지 ‘공간’ 기자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한다.건국대 산업디자인학과 겸임교수, 2018베니스건축비엔날레 공동 큐레이터 등을 지냈다.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 ‘이타미 준: 바람의 조형’‘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 ‘김중업 다이얼로그’ ‘올림픽 이펙트: 한국 건축과 디자인 8090’ 등 여러 전시를 기획했다.<파빌리온, 도시의 감정을 채우다> <건축, 전시, 큐레이팅>(공동)을 썼다.
정다영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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