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연장 10회말…평생 야구 열정 인도차이나에 쏟겠다”[논설위원의 단도직입]

차준철 기자 2023. 1. 10.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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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최초의 사나이’ 이만수
이만수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이 지난 3일 경향신문사 스튜디오에서 53년째 함께한 야구공을 쥐어 보이고 있다. 라오스와 베트남에 야구를 전파하고 있는 그는 인터뷰에서 “야구로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더불어 사는 삶을 알리려 한다”고 말했다. 이준헌 기자 heon@kyunghyang.com
1958년생. 한국 프로야구 1호 안타·타점·홈런의 주인공이다. 대구중·대구상고·한양대를 거쳐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1982~1997)에서 선수로 활약했다. 선수 은퇴 후 미국 메이저리그 코치를 경험했고 SK 와이번스의 수석코치·감독을 지냈다. 지도자에서 물러난 뒤 라오스·베트남에 야구를 전파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라오스 야구협회 부회장, 베트남 협회 고문이다. 2016년 국내외 야구 꿈나무 지원을 위한 사단법인 헐크파운데이션을 설립해 이사장을 맡고 있다.
53년간 야구 하며 받은 사랑 갚으려 국내외 후학들에 재능기부
후배들에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이 중요하다는 걸 알리고 싶다

이만수(65), 프로야구 올드 팬이라면 모를 리 없는 추억의 이름이다. 1982년 3월27일, 한국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 당시 삼성 라이온즈의 4번 타자. 한국 프로야구 첫 안타, 첫 타점, 첫 홈런을 터뜨린 ‘최초’ 그 자체다. 개인 통산 100홈런, 200홈런도 처음 쳤고 타격·타점·홈런 3관왕인 ‘트리플 크라운’도 최초로 해냈다. 프로야구 40년 역사의 살아있는 전설로 통한다. 홈런을 치고나서 펄쩍펄쩍 뛰며 그라운드를 도는 자칭 ‘오두방정’ 세리머니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지금의 이만수는 재능기부와 선행의 아이콘이다. 화려한 선수 시절을 거쳐 미국과 한국에서 코치와 감독을 지내고 2014년 프로야구 현장을 떠난 뒤 지금껏 국내외 야구 후학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일. 야구 불모지 라오스에 건너가 야구를 보급하고 국가대표팀을 만들어 아시안게임에 출전시켰다. 국내에서도 한 해에 50곳씩 부지런히 학생·장애인 야구팀을 찾아다니며 야구를 가르치고 돕는다. 2016년부터는 자신의 별명을 딴 재단 ‘헐크파운데이션’을 설립해 자선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선수로 입문한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53년째 야구와 함께 사는 그의 꿈과 희망은 무엇일까. 남들 말마따나 사서 고생하고 득도 없는 일에 나서는 이유는 뭘까. 지난 3일 경향신문사에서 그를 만나 야구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53년간 야구를 하면서 받은 사랑을 나눠야겠다는 생각”이라며 “사회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후배들에게 조금이나마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은퇴 후 많은 곡절 겪고 더 큰 시련에도 버티고 이겨낼 힘 얻어
감독 땐 기다림과 인내 배워…라오스 등에서 인생 2막 펼쳐

- 지난해 말 여러 곳의 야구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소감은.

“오랜만에 시상식장에서 야구 후배들을 만나 반가웠다. 그런데 내가 원로로 소개되는 걸 보면서 당황스럽기도 했다. 벌써 이렇게 됐나 싶었다. 선수로서 수많은 상을 받았는데 공로상은 감회가 새로웠다. 사실 나는 공로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뒤에서 헌신하는 스태프와 후원자들이 있었기에 내가 53년째 야구를 하고 동남아시아에 야구 보급을 할 수 있었다. 공로상은 그분들의 몫이다.”

- 지난해 ‘프로야구 40년 레전드 40인’ 중 한 명으로도 뽑혔다.

“영광이다. 40인 레전드로 선정돼 대구 구장에서 시구를 했는데 마음이 울컥했다. 나는 이제 추억이고 사라져갈 뿐이지만 손주들이 나중에도 추억할 수 있다면 그게 보람이 아닌가 싶다. 여덟 살 손자가 예전에 내가 조금 유명한 선수였다는 걸 알게 됐다.”

- 인생 여정을 야구 경기에 비유하기도 했다. 지금은 몇 회를 뛰고 있나.

“연장 10회말을 지나고 있다. 정규 이닝 1~3회는 청년기, 4~6회는 이후 프로야구 선수로 보낸 뒤 7~9회를 미국과 한국의 지도자 생활로 마쳤다고 생각한다. 프로 현장에서 나온 지 10년 된 지금은 국내외 청년들에게 야구를 전파하고자 재능기부와 자선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 연장전, 인생 2막의 목표는 무엇인가.

“야구 불모지인 인도차이나반도 다섯 나라에 야구를 보급하는 일이다. 야구 선배로서 거기에 작은 주춧돌을 놓아주고 싶다. 근 10년이 걸려 라오스에 야구를 전했고 2021년부터는 베트남에서도 시작했다. 태국·캄보디아·미얀마가 더 있는데 내 평생 이루지 못하면 후배들이 꿈을 이어주기 바란다.”

이만수 전 감독의 1996년 프로야구 선수 시절. 경향신문 자료사진

영원한 22번. 지금도 달고 있는 포수 이만수의 상징 같은 등번호다. 배트를 내리찍는 도끼 타법이 아니라 호쾌하게 걷어올리는 어퍼스윙으로 홈런을 펑펑 날리는 것도 그의 전매특허다. 최우수선수, 홈런왕, 골든글러브, 올스타 등 선수 시절 그가 따낸 타이틀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그는 타고난 타자, 포수가 아니라고 했다. 학창 시절 잠을 줄여가며 악착같이 훈련한 결과라고 했다. 16년 선수생활을 말년에 씁쓸히 마치고는 무작정 미국에 가서 메이저리그를 배워보겠다고 ‘무모한’ 도전에 나섰다. 10년간 미국 야구를 경험하고 국내에 복귀해 SK 와이번스의 수석코치·감독을 지냈지만 팀 성적이 부진해 숱한 고초를 겪었다. 선수 전성기 때와 달리 곡절이 많았다. 그는 그런 어려움이 있었기에 더 큰 시련에도 버티고 이겨낼 힘을 얻었다고 했다.

- 학생 선수 시절 하루 4시간 자고 연습했다고 했다.

“중1 때, 야구를 늦게 시작하고 소질도 없어서 중학교를 1년 더 다녔다. 중학교 4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까지 11년 동안 하루에 4시간밖에 안 자고 훈련했다. 그때 얻은 첫 별명이 ‘쌍코피’였다. 자다가도 피곤해서 쌍코피가 주욱 흘렀다.”

- 그렇게 고된 훈련을 하면서 야구를 그만두겠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나.

“희한하게, 한 번도 없었다. 그때, 10년 후에는 메이저리그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키운 게 계속 노력을 쏟는 동기가 됐다.”

- 타고난 야구 재능이 있지는 않았다는 말인가.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천만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나는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고 야구를 잘 몰랐다. 후천적인 노력으로 지금까지 온 것이다.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면 내 재주만으로 이렇게 안 됐을 거다. 나는 10년 앞을 내다보는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실천했을 뿐이다.”

- 10년 계획?

“지금까지 10년 주기로 3번의 목표를 세웠다. 첫 번째는 야구 시작할 때 10년 후 한국 최고 선수가 되겠다는 꿈이었다. 두 번째는 1997년 프로 선수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떠나며 10년 안에 메이저리그 코치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3년 만에 꿈을 이뤘고 미국에서 10년을 채운 뒤 귀국했다. 세 번째는 국내 지도자로 활동하며 미국 야구를 후배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는데 이 또한 10년 가까이 했다. 60세부터는 20년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20년 안에 인도차이나반도에 야구를 전파하고 라오스에서 세계대회를 여는 것이다.”

- 선수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프로야구 1호 안타, 타점, 홈런을 기록한 개막전이다. 트리플 크라운은 다른 선수들도 할 수 있는 건데, 이 기록은 영원히 나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2005년 미국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는 시카고 화이트삭스 코치 시절. 경향신문 자료사진

- 1997년 선수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떠났다.

“마흔 살 때였다. 선수로 더 뛰고 싶었는데 욕심 같지 않았다. 팀에서 방출되고나니 정신이 없었다. 그때 야구가 끝나면 모든 게 끝나는 줄 알았기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미국에 가서 지도자 공부를 하려고 학원 새벽반에 다니며 영어회화를 배웠는데 사투리 때문에 잘 안 됐다. 어쨌든 지인 소개로 미국에 건너갔고 마이너리그 팀 2곳을 거쳐 3년 만에 메이저리그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불펜포수 코치가 됐다.”

- 초기에 고생이 많았을 텐데.

“말도 안 통하고 문화가 달라서 애를 먹었다. 초창기 마이너리그 코치 때 한국서 겪은 대로 선수들에게 계속 잔소리하고 지적질했더니 감독이 내게 한국으로 보내겠다고 하더라. 선수들 장점을 칭찬해주라고만 해서 무척 어색했다. 그러면서 그들의 지도 스타일을 조금씩 배워나갔다. 이런 어려움을 겪은 게 면역이 생긴 것처럼 힘이 됐다. 더 큰 풍파가 닥쳐도 이겨낼 수 있었다. 내 인생에 굴곡이 여러 번 있었는데 아픔이 있었기에 극복할 수 있었다. 내가 만약 최고 선수로 대우받고 미국에 갔다면 도중에 때려치고 나왔을 거다.”

- 미국에서 체득한 지도자상을 국내에서 선보이려 했을 텐데.

“주입식 개조 방식이 아니라 선수들의 개성과 창의성을 키워주는 것. 선수가 잘하도록 어드바이스하는 게 감독의 역할이고, 감독은 근엄하게 폼 잡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SK 감독 하면서 욕도 참 많이 먹었고, 재계약 못해 잘렸다. 팀 성적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 감독 시절을 총평한다면.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다. 감독은 기다림과 인내의 자리라는 걸 배웠다. 라오스나 베트남에서도 10년, 20년, 30년 후를 기다릴 수 있게 됐다.”

2014년 11월 라오스에서 처음 만난 선수들과 함께한 장면. 헐크파운데이션 제공
인도차이나의 다섯 나라에 야구의 작은 주춧돌 놓아주고 싶다
내 평생에 이루지 못하면 후배들이 그 꿈을 이어주기를 바라

그는 2014년 11월 라오스로 향했다. SK 감독에서 물러난 직후였다. 라오스에 야구를 전파해달라는 현지 교민의 1년 전 요청에 “감독을 그만둔 뒤 돕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라오스가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몰랐다고 했다. 야구 보급하러 라오스에 간다고 하니 주위에선 “미쳤다. 불가능하다”고 했다. “좋은 일 하는 걸로 언론플레이 한다”는 험담까지 나왔다. 그래도 갔다. 그렇게 라오스가 그의 인생 2막에 들어왔다.

- 라오스에 갈 결심을 한 이유는.

“솔직히, 지도자로 컴백하기 위해 갔다. 쉬지 않고 지도를 계속하면서 멋있게 보이려는 욕심이 있었다.”

- 막상 가서 보니 어땠나.

“40도 땡볕더위에 야구해보겠다고 11명이 모였더라. 5명은 맨발이었다. 전에 보내준 헌 유니폼을 입고 있어 겉모습은 SK 3군 같아 보였다. 사비로 공과 배트, 양말과 언더셔츠도 보내줬는데 도무지 야구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 야구라는 단어 자체가 없는 나라였다. 야구공을 발로 차는 걸로 아는 아이도 있었다.”

- 그래서 어떻게 했나.

“선수부터 뽑자고 했다. 그쪽에서 귀한 생수와 빵을 주겠다고 학교들에 플래카드를 붙였더니 300명이 왔다. 달리기, 캐치볼을 시켜 선수로 뽑은 게 40명이다. 라오스 최초의 국가대표 야구선수단이다. 그런데 한 달쯤 해보니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런데 계속하게 된 계기는.

“한국으로 돌아가서 다시는 안 오겠다고 마음먹고 돌아서는데 한 아이가 팔을 붙잡았다. ‘아짱, 우리랑 야구해요’라고 말했다. 아짱은 선생님이란 뜻이다. 그때 찡해지면서 라오스에서 평생 야구하기로 결심했다. 그후 매년 계절마다 한 달 반씩 라오스에 머물렀다.”

‘헐크’ 이만수가 오늘도 변함없이 따뜻한 일에 나서는 이유는
같이 아파하고 조금씩 나누며 더불어 사는 세상을 그리기 때문

- 라오스 야구를 어떻게 키웠나.

“라오스 정부 관계자는 2년쯤 지나서야 만나줬다. 라오스 야구협회부터 우선 만들자고 했다. 내가 부회장이 됐다. 그리고 국가대표팀이 생겼으니 아시안게임에 나가자고 했다. 헐크파운데이션이라는 재단을 만들어 십시일반 후원을 시작했다. 축구장에서 야구를 하다보니 레프트 쪽은 끝없이 길고 라이트 쪽은 짧아서 제대로 된 경기를 못했는데 후원을 받아 라오스 첫 야구장도 지었다. 2018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 내가 감독을 맡아 출전했는데 스리랑카와 태국에 졌다. 맨땅에 헤딩하고 밑빠진 독에 물을 부어 여기까지 왔다. 2021년 4월에는 베트남 야구협회 창설도 도왔다.”

- 지원에 어려움은 없나.

“인프라 말고도 선수단 운영과 대회 개최·출전에 돈이 많이 드는데 나만 바라보는 것 같아 솔직히 좀 지친다. 내가 만수르인 줄 아는 것 같다. 유명한 선수·감독이었으니 돈이 많으리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재단 기부금도 부족하다.”

- 그래도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처음에 라오스 아이들에게 꿈을 물었더니 하루 세 끼 밥 먹는 거라고 얘기해 깜짝 놀랐다. 이제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으면 정치인, 의사, 선생님을 말한다. 야구라고 답한 아이도 2명이 나왔다. 야구가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음을 느꼈다.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행복한 야구’를 꿈꾼다.”

‘헐크’ 이만수는 같이 아파하고 조금씩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그린다고 말했다. 그가 오늘도 변함없이 따뜻한 일에 나서는 이유다.

차준철 논설위원

차준철 논설위원 che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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