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칼럼] 그런 사람 또 있습니다
김탁환 | 소설가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냐고, 지나치게 꾸민 것 아니냐는 의심이 뒤따를 때가 있다. 속세의 상식과 기준을 뛰어넘는 삶이기에, 믿기 어려운 것이다. 영웅이니 협객이니 하는 상찬은 답이 아니다. 그 사람이 어디서부터 출발해 어떤 어려움을 겪었고 무슨 고민을 거듭하여 홀로 그곳까지 나아갔는가를 밝혀야 설득력이 있다. 이 어려운 작업에 도전한 다큐멘터리 두편과 더불어 새해를 맞았다.
먼저 다큐멘터리 <수라>를 보았다. 황윤 감독이 새만금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듣긴 했다. 2010년 4월27일 새만금 방조제가 준공됐고, 새만금 간척을 놓고 첨예하게 맞섰던 사람들도 대부분 떠났을 텐데, 할 만한 이야기가 무엇이 남았을까 궁금했다.
제목 그대로 수라 갯벌에 관한 이야기였다. 새만금에 아직 갯벌이 있다고 하면, 방조제 바깥 어느 해안이라고 여길 듯하다. 방조제 밖이 아니라 안이며 군산공항 바로 옆이라고 장소를 특정하면,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방조제 준공 뒤 갯벌들은 진작 사라지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던질 법도 하다.
여기서 소멸에 맞서며 회생의 길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2003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새만금 시민생태조사단’은 갯벌에 사는 멸종위기종인 저어새와 검은머리갈매기와 흰발농게와 금개구리 등 세세한 물증을 제시하며 부실한 조사와 막연한 편견들을 하나하나 뒤집었다. 20년이 넘도록 정기적으로 가서 보고 듣고 만지며 영상에 담고 사진으로 찍고 글로 남긴 자료의 힘이다.
<수라>는 조사단에게 이끌려 수라 갯벌과 새롭게 만나는 황윤 감독의 걸음을 줄곧 따른다. 날카로운 논쟁이나 무거운 질문 대신 천천히 부드럽게 갯벌의 사계를 보여준다. 관객들은 황 감독과 함께 습지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다가 부끄러움에 가닿는다. 갯벌이 아닌 적이 없었던 곳을 너무 일찍 망각의 어둠에 가둔 잘못을 깨달은 것이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를 뒤이어 보았다.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당 한약방’에서 오래전부터 장학금을 많이 내놓았다는 풍문을 듣긴 했다. 그러나 김장하 선생이 언제부터 어떤 마음으로 왜 그 일을 하였는가에 관해선 자세히 알지 못했다.
<줬으면 그만이지>라는 책을 쓰고 다큐멘터리에서도 취재를 이어가는 김주완 기자가 늘 힘들어하는 것은 김장하 선생의 완고한 침묵이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드러내는 질문엔 입을 닫고 피하며 물러났던 것이다. 인물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하듯이, 주인공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회고와 주장을 중심에 두고 일생을 구성하는 방식은 불가능했다. <수라>의 황 감독처럼, 김 기자도 다큐멘터리 처음부터 등장해선 움직인다. 선생에게 도움받은 사람들을 찾아 만난 뒤 그들의 목소리로 침묵의 구멍들을 하나하나 메운다. ‘돈은 쌓아두면 똥이 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된다’는 선생의 믿음이 거둔 열매들인 것이다.
선생이 평생 지킨 침묵의 파문은 넓고도 단단했다. <어른 김장하>에는 선생이 진주와 경남 지역에 미친 영향의 일부가 담겼다.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한 교육자로서의 면모와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 해방 운동인 형평운동을 계승하려는 굵직굵직한 노력도 새롭게 조명됐다.
<수라>와 <어른 김장하>는 우리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고 그 방향을 제시하는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황윤 감독은 더 많은 이들이 직접 가서 수라 갯벌과 만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새만금 신공항이 들어서면 힘겹게 명맥을 이어온 수라 갯벌은 영영 사라질 수밖에 없다. 갯벌을 지키려면 지금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2022년 5월31일 남성당 한약방은 문을 닫았다. 60년 가까이 한약방을 지켜온 김장하 선생의 명예로운 은퇴였다. ‘김장하 장학생’들과 지역에서 크고 작은 도움을 받은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선생의 뜻을 이어받겠다고 다짐했다.
새만금 시민생태조사단과 김장하 선생의 삶을 접하는 것이 마냥 기쁘고 감동적인 것만은 아니다. 긴 시간 그들이 보여준 모범이 고스란히 우리 앞에 질문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나는 위태로운 갯벌을 위해 어디까지 할 것인가. 나는 이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질문이 죽비처럼 어깨를 친다.
새만금 시민생태조사단의 바람은 바다 습지 생물들과 갯벌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고, 김장하 선생의 꿈은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시절을 한탄하거나 그런 사람 또 없다고 아쉬워만 말고, 그런 사람이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으면 한다. 우리도 그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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