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골짝’ 시골 고딩이 ‘세계적 성악가’로… 바리톤 김기훈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
BBC 콩쿠르 우승 후 커리어 확장
“콩쿠르는 순간, 커리어는 영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전 2023년이 오지 않을 줄 알았어요. (웃음)”
바리톤 김기훈에게 2023년은 너무나 ‘특별한 해’다. 미국, 유럽 등 세계 최고 무대에서의 데뷔가 줄줄이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오페라계에선 ‘가장 중요한 무대’로 꼽히는 ‘프리미어’(첫 공연)의 주인공으로서 말이다. 푸치니 오페라 ‘라 보엠’으로 미국 워싱턴오페라하우스에서 데뷔 무대(4월)를 가진 뒤 산타페 페스티벌, 텍사스 달라스 오페라, 영국 위그모어홀 등 전 세계에서 ‘한국인 바리톤’을 기다리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미뤄진 공연이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돼요. 마음 속으로도 준비하고 기다렸는데, 오지 않을 것 같은 2023년이 정말 이렇게 성큼 와버렸네요.”
성악 콩쿠르의 ‘끝판왕’으로 불리는 ‘BBC 카디프 싱어 오브 더 월드’ 아리아 부문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것이 2021년. 그의 목소리가 심사위원까지 울려버리자, 김기훈에겐 ‘양과 질이 다른 무대’가 주어지기 시작했다. 최근 소속사 아트앤아티스트 사무실에서 만난 김기훈은 “올해는 성악가로의 커리어에 가장 중요한 해”라고 말했다.
“콩쿠르는 순간이지만, 커리어는 영원해요. 콩쿠르에서의 우승 타이틀이 제 첫 걸음을 유리하고, 높은 위치로 만들어준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어떤 커리어를 쌓아가느냐는 거예요. 과거의 영광은 접어두고, 앞으로의 커리어에 집중할 생각이에요.”
BBC 콩쿠르 우승 이후 김기훈은 바쁜 날들을 보냈다. 코로나19로 해외 공연이 취소되며, 지난해는 한국에서의 무대가 많았다. 그는 “공연도 많았고, 어김없이 슬럼프도 찾아온 한 해였다”고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전 ‘소리쟁이’이니까요. 어떻게 하면 소리를 더 잘할 수 있을까, 힘이 안 들어가는 방법은 뭘까 고민하고 연구하다 보니 수렁에 빠지는 경우가 생기기도 해요. 그러다 보면 슬럼프가 찾아오고요.”
김기훈은 학구적인 성악가다. 새로운 작품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고민한다. 성악가로서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면서 ‘잘 길들여진 경주마 같은 소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늘 이만하면 됐다, 이 정도면 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슬럼프가 찾아와요. 교만해질 때쯤 찾아와 교만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슬럼프를 극복하면 성장해있을 거란 확신이 있어요. 그래서 그 시기를 잘 이겨내려 하고 있어요.”
세계 정상에 서기까지 10여 년. 성악가 김기훈의 책엔 무수히 많은 드라마가 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을 “골짝나라 곡성”이라고 부른다. ‘성악가 흉내’가 개인기였던 ‘고딩’은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다” 뒤늦게 성악을 시작했다. ‘전남 곡성 유일의 세계적인 성악가’다.
그 긴 시간 ‘꽃길’만 걸었던 것은 아니다. 10년 전엔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전역할 무렵 성대결절이 왔고, 경제적으로 너무나 힘들어 성악가의 꿈을 고민했어요. 이 길을 계속 가는 것이 맞나 싶은 의심이 들던 때였어요.” 그 시절 복싱이나 격투기 선수로의 ‘플랜B’까지 세웠다. 지독한 슬럼프였지만, 그의 삶은 노래가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하게 두진 않았다.
“가끔은 10년 전의 제가 지금의 실력과 커리어를 가지고 있었다면 얼마나 편하고 좋았을까 그런 생각도 해요. (웃음) 지금에 와서 보니, 그 때의 저에게 잘 살고 있다고 토닥여 주고 싶어요.”
시기마다 놓인 크고 작은 관문들을 열어 젖히자, 국제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BBC 콩쿠르’ 우승 2년 전이었다.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었다. 김기훈에겐 ‘만년 2등’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2019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2위, 2019 오페랄리아 콩쿠르(도밍고 콩쿠르) 2위를 했던 이력 때문이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당시 김기훈이 2등을 하자, 객석과 마린스키 극장 관계자들은 “왜 기훈 킴이 1등이 아니냐”는 항의까지 했다.
이제는 ‘세계 최고’의 수사가 따라오는 성악가이지만, 김기훈은 그의 길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는 “만족하는 예술가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한다. 음악가로의 방향성이기도 하다. “주어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되, 최상의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어찌 보면, 끝없는 욕심이기도 하고, 더 나은 저를 만들기 위한 불만족이기도 해요.”
세계 무대 데뷔의 원년이 될 올해는 벌써부터 스케줄이 빽빽하다. 오는 2월까진 국내에서 신년음악회를 소화하고, 3월엔 서울시오페라단의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파파게노 역을 맡아 관객과 만난다. 이 작품은 그에게도 도전이다. “파파게노는 너무 말이 많아요.(웃음) 늘 심오하고 진지한 역할을 했는데 이런 캐릭터는 처음이라 고민을 많이 했어요.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역할은 이번이 아니면 다시 할 수 없을 것 같아 하게 됐어요.” 장담할 순 없지만,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파파게노 무대다.
김기훈은 “종종 10년 후의 모습을 그려본다”고 했다. 성실하게 커리어를 쌓으며 “단지 노래를 잘하고 연기를 잘 하는 성악가를 넘어 ‘그레이트 싱어’(Great Singer)의 모습에 가까워지는 미래”를 상상한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10년 후의 저와 대화를 하고 싶어요. 그 날의 저에게 지금의 제가 위로를 받고 싶다는 생각도 해요. 그리고 여전히 사람들에게 잘 하고 있는지, 인간답게 잘 살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예술가 김기훈이 아니라 사람 김기훈으로의 제가 궁금하기도 해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지금의 이 과정을 더 잘 살아내려고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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