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 북두칠성을 얹은 조선은 ‘모자의 천국’이었다

김신성 2023. 1. 10.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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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상투문화가 효시
황하문명 1000년전에 옥고 출토
상투의 한자어 상두는 ‘북두칠성’
상투는 하늘과 인간 연결 매개체
동이족의 고유한 머리 양식 정착
모자를 명예로 여긴 왕국
조선, 신분제 안착위해 의관 강제
민중은 다양한 모자 만들어 착용
신분·직업·나이에 따라 적절히 써
일제, 학도모자 도입해 ‘쓰개’ 말살
“조선은 가장 독특한 모자 문화를 지닌 나라다. 모자에 관해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조언을 해주어도 될 만큼 수많은 종류의 모자를 만드는 모자 천국이다.”
콘스탄스 테일러가 그린 ‘서울 풍경’. 사모, 갓, 초립, 패랭이, 방갓, 장옷, 쓰개치마 등 일곱 모자를 볼 수 있다
19세기 후반 조선에 들어와 고종의 공식 초상화를 그렸던 프랑스 화가 조제프 네지에르(1873∼1944)가 남긴 말이다.
앞서 조선을 찾은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빌 로웰(1855∼1916)은 저서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조선인은 모자를 명예의 상징으로 귀하게 여긴다. 집안에 들어갈 때 신발은 벗고 들어가지만, 모자만은 꼭 쓰고 들어간다. 식사 중에도 편한 차림을 위해 겉옷은 벗어도 모자만은 쓰고 식사를 한다”고 기록했다. 아예 한 챕터를 할애해 조선 모자를 보고 느낀 점을 가득 채운 그는 “서양 박물관의 큐레이터들이 조선을 모자 천국이라고 할 만큼, 조선에는 품위와 미적 충실도가 높은 모자가 용도별로 넘쳐난다”고 적었다.
화관. 조선 여성의 의례용 관모로 몽환적 외관을 자랑하는 품격과 미적 가치를 지닌 머리 장식품이다.
조선이 모자 왕국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그림도 있다. 스코틀랜드 여성 화가 콘스탄스 테일러가 1904년 발간한 ‘조선의 일상’에 실린 ‘서울 풍경’이다. 지금의 광화문 광장인 육조거리에서 그린 이 한 장의 풍경화에는 오가는 행인들이 쓰고 있는 쓰개(모자)만 해도 사모, 갓, 초립, 패랭이, 방갓, 장옷, 쓰개치마 등 일곱 가지나 볼 수 있다.
조선은 왜 모자 왕국이 되었을까. 조선의 모자는 상투문화에서 비롯됐다. 유별나게 머리를 중시하는 존두사상(尊頭思想), 여기에 선비의 의관정제 의식, 성리학의 윤리관, 계급사회 체제가 영향을 끼쳤다.
옥정자. 최상품 갓 ‘옥로립’의 윗부분 장식품으로 외국에 나가는 사신이 주로 착용했다. 옥으로 깎은 해오라기는 청렴결백을 상징한다.
상투는 한자어 상두(上斗)에서 나온 말로 상두는 북두칠성을 가리킨다. 머리에 북두칠성을 얹었다는 뜻이다. 우리 조상은 상투를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여겼다. 황하문명보다 1000년 앞선 홍산문화 유적은 고조선 문명의 전단계다. 여기서 상투를 고정하는 옥고(玉箍)가 다량 출토됐다. 옥고는 중국 내륙과 남쪽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상투가 동이족의 고유한 머리 양식이기 때문이다. 상투를 틀 때는 정수리 부분 머리를 깎아내고 주변머리만을 빗어 올린다. 이를 ‘베코(백호) 친다’고 했다. 정수리에 머리카락이 모이면 열이 발산되지 않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죽전립. 대나무실로 만든 갓으로 왕이 특별한 궁중행사 때 착용했다.
조선 모자의 뿌리는 이처럼 고조선의 상투와 닿아 있다. 이 오랜 관습이 조선 성리학과 융합해 시너지 효과를 가져왔다. 조선 양반들은 상투가 관모 밖으로 비치지 않도록 상투 위에 상투관이라는 또 하나의 작은 관모를 착용한 뒤 탕건과 갓을 썼다.
조선 조정은 국가 질서를 조속히 안정시키고자 신분제도를 강력하게 시행하며 백성들의 복식까지 일일이 간섭했다. 지배계층은 양반과 중인, 피지배계층은 상민과 천민이었다. 상민은 농업, 수공업,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을 말하며, 천민은 노비, 광대, 무당, 백정, 기생, 물꾼, 걸인 등이다. 신분제도의 목적은 신분 차별이다. 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방법이 옷과 모자, 즉 의관이다. 조선 조정은 신분에 따라 써야 할 모자와 쓰지 말아야 할 모자를 엄격하게 강제했다.
양관. 새해 첫날, 국경일, 대제례, 조칙의 반포 때 문무백관이 금관조복에 착용하는 관모.
그러나 아무리 법이 가혹하고 신분 차별이 심해도 인간의 미의식을 향한 열망은 꺾이지 않는다. 수묵화처럼 담백하게 살았을 것만 같은 조선의 서민들은 열망마저 소박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같은 종류의 모자라도 개성을 드러내고자 모양과 장식을 조금씩 달리해서 착용했다. 조선 모자문화는 계급사회라는 강고한 체제 아래서도 미의식을 버리지 않았던 조선 민중들의 열망에 따라 수많은 종류의 모자로 진화하며 꽃을 피워 나갔다.
조선에는 어떤 모자가 있었을까. 이름만 부르기에도 숨차다. 먼저 왕의 관모로는 면류관, 원유관, 익선관, 통천관, 죽전립 등을 꼽을 수 있다. 궁중 의식용으로는 각건, 진현관, 개책관, 아광모, 오관, 화화복두, 가동용 초립 등이 쓰였다. 문관용 관모는 양관, 제관, 복두, 사모, 백사모 등이고, 무관용 투구는 첨주, 원주, 면주, 간주, 두석린, 두경, 등두모 등이다. 선비용도 다양하다. 초립, 흑립, 옥로립, 백립, 정자관, 동파관, 충정관, 장보관, 방관, 망건, 감투, 유건, 효건, 굴건, 휘항, 이엄 등을 적절히 썼다. 중인들은 유각평정건, 무각평정건, 오사모, 조건, 방립 등을 사용했다.
보부상 패랭이. 굵은 대오리로 성글게 엮어 뜨거운 햇빛을 가렸다. 보부상은 흰 목화솜을 달아 신분을 나타냈다.
여성은 예장용으로 화관, 족두리, 가리마, 전모를, 방한용(난모)으로 남바위, 조바위, 아얌, 풍차, 볼끼, 내외용으로 면사, 개두, 너울, 장옷, 쓰개치마, 처네 등을 애용했다. 서민들은 갈모와 패랭이를 만들어 썼고, 천민층은 벙거지, 삿갓, 패랭이를 이용했다.
그런데 이처럼 많던 조선의 쓰개들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뭘까. 1895년 내려진 단발령 탓이다. 조선 내 소요를 격발시켜 군대 파병을 노린 일본의 계략이 숨어 있었다. 상투를 자르라는 칙령은 갓을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갓을 버린다는 것은 양반이라는 신분과 문명인이라는 자긍심, 자아의 일부를 상실하는 것이었다. 1920년대는 한복, 양복, 일본 복식이 섞이고 모자도 뒤죽박죽인 혼란기였다. 하얀 두루마기에 도리우치(따개비) 모자를 썼는가 하면 중절모를 착용한 이도 많았다. 상투에 갓을 쓰고 향교와 고택을 지키는 이도 있었다.
일본 군국주의 잔재인 학도모자는 1980년대 초반까지 이 땅을 누비다가 자취를 감췄다.
한반도를 병탄한 일본은 얄궂은 학도모자를 들여왔다. 검은색 학도모는 중·고등보통학교와 전문학교, 대학교, 심지어 소학교 학생들의 머리마저 점령하고 말았다. 볼품없는 일본의 학도모는 대동아 공영을 부르짖던 군국주의가 모태였다. 이 모자는 1980년대 초반까지 질기게도 이 땅을 누비다가 자취를 감췄다.
조선의 쓰개를 상세하게 정리한 책 ‘모자의 나라 조선’(주류성)을 쓴 이승우는 조선 모자에 대해 “우리 민족이 지닌 창의력과 고도로 정제된 독창적 미의식에서 비롯됐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면서 “식민지배로 피지배 민족의 문화와 사상, 말과 글, 이름 심지어 복식과 두식 같은 생활습속까지 깡그리 파헤쳐 놓은, 문화적 제노사이드(학살)를 저지른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고 고발한다.
겨울 방한모 풍차를 쓴 모자.
어느 겨울날 남바위와 조바위, 아얌이나 풍차를 쓴 우리 여인들이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며 담소하고, 호건과 굴레를 쓴 아이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팽이를 치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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