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칼럼] 구색만 갖춘 K칩스법, 진정성 없다
한국을 과연 반도체 강국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한국은 범용 메모리 칩인 D램과 낸드플래시 분야의 강자인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반도체 강국보다는 ‘메모리 강국’이라는 표현이 더 적확하다. 메모리 가격이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고 있는 가운데 두 기업의 적자전환이 예상되는 지금 시점에서는 반도체 강국이라는 말이 더 멀게만 느껴진다.
과거 메모리 반도체 사업은 천수답(天水畓·벼농사에 필요한 물을 빗물에만 의존하는 논)식 사업으로 불렸다. 4년마다 메모리 시장의 상승과 하강 사이클을 반복했고, PC 시장 상황에 따라 실적이 들쭉날쭉하기도 했다. 14년동안 흑자를 기록한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문도 2000년대에는 적자를 기록하는 것이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었다. 만년적자 신세였던 하이닉스 역시 SK그룹이 나서지 않았다면 해외 기업에 매각될 뻔 했다.
수년간의 치킨게임 끝에 일본 엘피다 등 굴지의 D램 기업들이 쓰러지며 공급업체가 소수로 재편됐고 2010년대 초반부터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장기호황 국면에 접어들었다. 일각에서는 ‘슈퍼사이클(장기호황국면)’을 언급하기도 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뿐만 아니라 대만이나 태국 등에서 작은 규모로 연명하던 메모리 기업들도 수백퍼센트대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하는, 말 그대로 ‘살아남은 자들의 잔치’였다.
10년 넘게 이어졌던 메모리 반도체 호황에 도취된 것일까, 한국 정부는 대만, 일본 등 경쟁국가들이 체계적으로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고 지원해온 것과 달리 소극적으로 변했다. ‘이제는 시스템 반도체를 키워야 한다’는 공허한 구호만 반복했을 뿐, 점점 고도화되고 있는 팹리스(설계전문기업), 소·부·장(소재·부품·장비), 후공정(OSAT), 파운드리 분야의 세계 트렌드를 분석하고 우리 현실에 맞는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무관심했다. 국책 반도체 연구개발 관련 투자도 거의 제자리 걸음이었으며, 최근에는 소부장에 대한 연구개발 지원이 줄어들기까지 했다.
반도체협회의 한 관계자는 “정부에서 반도체 산업을 거의 방치하다시피 내버려둔 건 굳이 지원하지 않아도 삼성전자가 세계 1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안이한 믿음 때문”이라며 “메모리 반도체와 시스템 반도체 분야와 완전히 다른 생태계이며, 대만 TSMC와 같은 기업이 1980년대부터 정부의 대대적인 투자와 지원으로 지금 지위에 올라섰다는 걸 애써 모른척 하려는 것 같다”고 꼬집기도 했다.
오히려 반도체 기업은 더 지원하고 키워야할 대상이 아니라 ‘죄인’ 취급을 받는다는 쪽이 더 어울렸다. 반도체 산업에 대한 정부 관료들의 몰이해는 지난 2018년 고용노동부가 산업재해 피해 입증을 이유로 삼성전자의 반도체 생산기술 노하우가 담긴 공장 설비 배치도, 장비, 제조에 사용되는 재료 등의 자료를 외부에 공개하라고 명령한 사건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반도체 업계, 학계 전문가들을 경악하게 만든 이 해프닝은 정부 관료들의 몰이해가 한국 반도체 산업의 자산과 기밀자료를 노출할 뻔한 아찔한 사건으로 회자된다.
기획재정부가 애초에 반도체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율을 8%로 제시했다는 것도 반도체 산업에 대한 인식의 민낯을 보여준다. 이는 심지어 야당이 제시한 10%를 하회하는 숫자다. 윤석열 대통령이 세액공제율을 높이라고 지시하자마자 이틀 만에 내부 결론을 뒤집고 공제율을 15%로 상향했지만 결과적으로 미국 등 선진국을 따라 숫자만 맞췄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세계 반도체 시장 경쟁은 거의 총성 없는 전쟁이나 다름 없는 수준이다. 코로나 시국에서 극심한 반도체 부족을 경험한 미국, 중국, 일본, 유럽 등 각국은 전례 없는 수준의 국고를 쏟아내 자국의 반도체 기업을 지원사격하고 있다. 특히 반도체 시장의 헤게모니가 한국이 취약한 시스템 반도체 설계, 후공정,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등으로 쏠리고 있는 가운데 학계 일각에서는 ‘한국은 이미 늦었다’는 회의론까지 나온다. 2020년대에 들어선 이후 중국, 대만의 반도체 설계 역량과 소·부·장 생태계가 한국을 10년 이상 앞서가고 있다는 설명이다.
한참 뒤처진 추격자가 현실 파악 못하는 정부와 정쟁(政爭)을 반복하는 정치권에 발목을 잡힌 사이 경쟁자들은 망설임 없이 전진하고 있다. 반도체 투자 장려·유치의 기초 토양 작업이나 다름 없는 반도체 투자세액공제를 두고 더 파격적인 지원책을 제안하기는 커녕 미국이나 중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구색만 맞춘 K-칩스법에서는 어떠한 다급함이나 진정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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