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간 톱배우’ 정선아 “출산 후 복귀까지 두려웠지만…이젠 인생 2막”
첫 작품 ‘렌트’부터 ‘이프덴’까지
명실상부 뮤지컬계 톱여배우
임신, 출산으로 1년 6개월 공백
“두려움 이기고 계단 한 칸 올라…
길고 오래, 책임감 있는 배우 되고파”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물질 만능주의’와 ‘외모 지상주의’로 점철된 이집트의 공주(‘아이다’),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핑크 마녀(‘위키드’), 아름다운 외면 안에 감춰진 욕망을 풀어내는 공작부인(‘웃는 남자’)….
이른바 ‘대작 뮤지컬’엔 정선아(38)가 있었다. 대극장 공연장의 천장을 뚫어버리는 시원시원한 고음과 아름다운 음색, 화려한 캐릭터 못잖게 공연장 뒷좌석에서도 눈에 띄는 자기주장 강한 이목구비. “혜성처럼 등장한 여고생 배우”로 불리던 정선아는 지난 20년간 뮤지컬계 ‘톱’ 자리를 지켜왔다.
“제가 원해서든 아니든, 제 인생이 어떤 길로 잘 가고 있더라고요. 사실 결혼 생각도 없었던 비혼주의자였고, 아이를 예쁘다고 생각한 적도 없는데 어느새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어요. 공백 이후 다시 무대로 돌아오기까진 두려운 마음이 컸어요.”
정선아가 세상에 나온 것은 2002년 12월 뮤지컬 ‘렌트’를 통해서였다. 공개 오디션을 통해 여주인공 미미로 발탁돼 성공적인 신고식을 치렀다. 이후 쉼 없이 무대에 올랐다. 지난 1년 6개월의 공백은 데뷔 이후 가장 오랜 시간 뮤지컬 무대에 서지 않은 시간이었다.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선아는 “임신과 출산으로 2022년은 많은 변화가 있었던 해였다”고 돌아봤다.
다시 돌아온 정선아의 선택은 의외였다. 화려한 ‘미모’를 드러내면서도 어딘가 허술하고, 그 연기가 너무도 능청스러웠던 ‘강렬한 캐릭터’를 내려놨다.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관객과 만나는 ‘이프덴’(2월 26일까지·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선 지극히 평범한 서른아홉 살 여성의 삶을 진솔하게 그려간다. 일상 앞에 놓인 다양한 선택을 통해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엘리자베스의 이야기는 일과 사랑, 출산과 커리어,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풀어내며 공감대를 쌓는다.
“사실 그동안 대극장이 아닌 소극장에서, 가발과 메이크업을 줄이고 관객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그런데 두렵더라고요. 관객들이 정선아의 작품을 보러오는 이유는 뭘까 생각해보면, 뻥 뚫리는 고음을 듣고 싶어서였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늘 용기가 없어 도전하지 못했는데, 아기를 낳고 나니 나의 길을 개척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래와 연기를 겸하는 뮤지컬 배우에게 임신과 출산이 주는 두려움과 불안도 컸다. 그는 “공백 동안 무대에 대한 갈증은 컸지만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고 털어놨다.
“임신 동안 살이 22㎏이나 쪘고, 체력도 예전같지 않더라고요. 1년 6개월이나 자리를 비웠는데, ‘관객들이 그동안 나를 잊어버리진 않았을까’,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다시 사랑받을 수 있을까’, ‘아기 낳더니 예전 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이 크더라고요.”
다시 무대에 돌아오기 위해 매일 운동을 했고, 이전의 기량을 유지하기 위해 보컬 레슨까지 받았다. 연습하는 동안엔 매일같이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고 한다. 우는 날도 웃는 날도 많았다. “원래도 암기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대사도 너무 많더라고요. (웃음)” 두꺼운 무대 화장을 지워내고, 어딘가에 있을법한 사람 안으로 걸어들어간 정선아는 이번 작품을 통해 온전히 그의 얼굴을 보여준다. “불필요하게 연기를 많이 하지 않고, 나의 이야기를 보여주니 많은분들이 우리 이야기라고 느끼시는 것 같았어요.”
첫 공연 이후 그토록 두려웠던 관객의 반응은 뜨거운 함성으로 받았다. “펑펑 울었어요. 공연을 마치고 복귀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더라고요. ‘노래 잘 한다, 연기 잘 한다’는 칭찬이 아니라, 너무나 공감해서 울고 웃었다는 리뷰를 보고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배우로서의 기쁨과 행복을 느꼈어요.”
지난 20년, 정선아는 천생 뮤지컬 배우였다. 한 눈 한 번 팔지 않고 무대에만 섰다. 뮤지컬 ‘외길 인생’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데뷔와 동시에 여주인공 자리를 꿰차며 승승장구했지만, 20년의 긴 시간 동안 즐거운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데뷔 10년차쯤 됐을 때는 슬럼프가 왔었다”고 고백했다.
“어린 나이에 너무 빨리 꿈을 이루고 나니, 감사한 줄도 행복한 줄도 모르고 공허해졌어요. 어느 순간 뮤지컬이 너무 재미없고, 싫어지더라고요. 더 많은 역할이 주어져 어린 정선아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데, 내면은 자라지 못했던 거죠. 아름다운 목소리와 제게 주어진 것들,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며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었어요.”
철 없던 시절엔 “패기로 센 척”도 했다. “박수칠 때 떠나겠다”며 호기롭게 선언했다. 하지만 그에게 무대는 패기 넘치게 떠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지금의 변화가 너무 좋아요. 두려웠지만, 그 두려움을 이기고 계단 한 칸을 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열아홉 고등학생이 저의 인생 1막이었다면, 지금은 배우로도 한 사람으로도 인생 2막이 시작됐어요. ‘짧고 굵게, 강하고 인상 깊게’라는 말은 제겐 아니에요. (웃음) 얇고 잘아도, 길고 오래 무대에 서고 싶어요. 큰 욕심 없이 지금처럼, 저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책임감 있는 배우로, 좋은 동료들과 행복하게 이 길을 가고 싶어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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