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기억상실·재회 뻔한 스토리… 그런데 왜 코끝이 시큰할까[박동미 기자의 두근두근 정주행]
■ 박동미 기자의 두근두근 정주행 - 넷플릭스 일본 드라마 ‘퍼스트 러브 하츠코이’
1990년대 첫사랑 남녀 주인공
이별뒤 2010년대 공허한 모습
교차 전개로 애잔한 사연 담아
재회뒤 서로 회복하는 과정은
첫사랑이 상징하는 꿈·호기심
‘바로 우리가 잊고 살았던 것’
‘그리고 지금 가장 소중한 것’
(※드라마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음)
첫사랑만큼 뻔한 주제도 없다. 뻔한 것 중에서도 가장 뻔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만들어진 일본 드라마 ‘퍼스트 러브 하츠코이’의 예고편을 봤을 때, 오래 좋아했던 음악이 흘러나와 반가웠지만, 선뜻 재생 버튼을 누르지 못한 이유다. 교복을 입은 남녀가 이어폰을 나눠 끼고 음악을 듣거나(그러다 자연스럽게 키스를 하겠지), 눈 내린 바닷가를 거닐고(그러다 분명 모래 위에 무언가를 쓸 것이다), 소중한 물건을 나무 밑에 묻고(타임캡슐도 빠질 수 없다)…. 로맨스물의 클리셰란 클리셰는 모조리 쏟아부은 드라마를 파격적인 설정과 화려한 출연진, 충격 반전으로 무장한, 전 세계가 열광한다는 K-드라마들 사이에서 굳이 고른다는 건, 괜히 ‘지는’ 기분이 들었다.
결론은, 봤다. CD플레이어와 이어폰이 있고 휴대전화는 없던 시절. 1990년대 말 일본문화 개방 직후, 현지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해 당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우타다 히카루의 ‘퍼스트 러브’(드라마는 이 노래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가 흘러나오고,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직후 외화 유출 우려에도 불구하고 N차 관람 열풍을 일으킨 영화 ‘타이타닉’이 등장하고, 이를 보고 나온 남녀가 “눈을 떠봐요” “나, 날고 있어요, 잭” 하면서 주인공들의 대사와 연기를 흉내 내며 깔깔거리는 드라마를, 보고 말았다. 그러니까, 졌다. 더는 볼 수 없어 오히려 귀해진 클리셰에. 드라마를 보는 내내 눈을 즐겁게 해주는 홋카이도의 봄, 여름, 가을, 겨울에.
9편의 에피소드로 이뤄진 드라마는 주인공들이 10대였던 1990년대와 30대 후반이 된 2010년대를 교차하며 전개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첫사랑인 나미키(기도 다이세이)와 야에(야기 리카코)는 홋카이도 작은 마을에서 ‘퍼스트 러브’(첫사랑)를 함께 들으며 자란다. 조종사와 승무원을 꿈꾸던 두 사람은 미래에도 함께 있을 것이라고 믿지만, 2018년으로 설정된 ‘현재’에 이들은 함께 있지도 않고, 조종사와 승무원도 아니다. 항공 자위대에 들어갔던 나미키(사토 다케루)는 전역 후 빌딩 경비원으로 일하고, 대학을 중퇴한 야에(미쓰시마 히카리)는 택시 기사로 생계를 이어간다. 나미키 옆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고, 야에는 이혼 후 혼자 살며 가끔 아들을 만나는 게 유일한 낙이다.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아 ‘첫’ 사랑이라지만, 두 사람은 왜 이렇게 됐을까. 드라마는 회상신을 통해 ‘현재’를 만든 ‘과거’를 보여주며, 이 궁금함을 차근차근 풀어나간다. 결정적인 건 야에의 기억상실(사실 이게 가장 핵심적인 클리셰였다). 고교 졸업 후 두 사람은 원거리 연애를 이어가다가, 어느 날 야에가 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는다. 하필 가장 가까운 시간부터, 나미키와 함께한 고교 시절 전체를. 야에 엄마의 부탁으로 나미키는 야에를 떠나고, 나미키의 존재도 모른 채 야에는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한다. 그렇게 10대 시절 꿈꾼 미래와 전혀 다른 삶을 살던 두 사람은 십수 년 후 삿포로 시내에서 우연히 다시 마주한다.
이쯤 되면, 결말부터 궁금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다시 맺어지는 걸까. 우연에 우연이 겹친다. 두 사람은 자꾸 마주치고, 스친다. 이거 이래도 되는 거야 하고 삐딱해지다가, 어차피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 서로 좋아하는 것 자체가 60억 분의 1쯤 되는 확률이라고, “기적은 정말 대단하지 않아?”라던 어린 나미키의 말들이 떠올랐다. 그러고 나면 이제 이 두 사람이, 그러니까 첫사랑이 이뤄져야 클리셰일까, 이뤄지지 않아야 클리셰일까 하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를 단숨에 정주행할 수 있게 만든 건, 조금만 검색해 봐도 나올 마지막 장면 때문이 아니다. 20여 년 세월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그저 잃어버린 첫사랑 찾기에 머물지 않아서다. 잊힌 시간의 간극을 메워나가며, 드라마는 ‘첫사랑’ 신화를 빌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살포시 일러준다. 30대의 나미키와 야에의 얼굴이 내내 쓸쓸하고 공허한 이유. 10대의 나미키와 야에의 얼굴이 늘 환하고 빛났던 이유. ‘첫사랑’은 사실, 삶을 밀고 나가게 하는 힘, 즉 꿈과 호기심을 대신하는 말이고, 드라마는 이를 간직한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을 대조시키는 듯도 보였다. 그래서, 야에의 기억을 살리고, 나미키의 존재를 살리고, 결국, 두 사람이 사랑뿐만 아니라 꿈과 호기심을 다시 회복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운명인지 아닌지 헷갈리면 일단 뛰어들어 봐”라고 말하는 나미키는 삿포로 전체 택시회사의 무전기를 도청하며 야에의 목소리를 찾아내고, 나미키가 자신의 첫사랑인 줄 모르고 다시 사랑에 빠진 야에는 “인생은 뛰어넘는 것”이라는 택시회사 동료의 조언에 용기를 얻고, 소심한 성격을 이겨내고 고백을 한다. “좋아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겨서 삶에 감사하게 돼요. 그건 멋진 일입니다.”
그러니까, 이 뻔한 줄거리의 드라마를 보면서 코끝이 시큰해졌다면 그건 기적 같은 두 사람의 재회에 감격한 것이기도 하고, 나이가 들어 안구 괄약근이 약해져서일 수도 있고, 어쩌면 오랫동안 잊었던 각자의 꿈과 호기심, 용기, 열정과 마주한 것일지도 모른다. 십수 년 만에 야에를 발견한 나미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던 순간처럼. 첫사랑처럼 애틋한, 우리 각자가 품었던, 그 ‘어떤’ 처음에 해당하는 모든 것 말이다.
배우들의 표정이 내내 좋다. 슬프면 슬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응답하라’ 시리즈와 ‘건축학 개론’의 몇 장면, 그리고 ‘러브레터’의 청량함을 이리저리, 요령껏 잘 섞은 것 같은 기시감이 들지만, 어색함이나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건 배우들의 명연기 덕분이다. 전화를 끊으며 ‘잘자’라고 한 여자친구의 한마디에 히죽히죽 웃으며 한참을 그 자리를 뜨지 못하는 남자, 헤어지기 싫은 마음을 모르고 남자가 택시를 잡아주자,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는 여자. 아, 그래, 그런 표정 있었지. 하고 각자 대면했던, 마주했던, 어떤 얼굴들을 떠올리게 될지도. 그리고 조용히 물을지도 모른다. 꿈, 호기심, 사랑 중 지금 내 삶엔 뭐가 남아있지 하고….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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