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쌀 영그는 붉은 벌판 볼 수 있을까

주영재 기자 2023. 1. 10.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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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벼 지킴이 이근이 우보농장 대표

[주간경향] 1910년대만 해도 토종벼가 전국에 1451개에 달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 비료를 이용해 생산량을 증대시킬 수 있는 일본의 품종이 보급됐기 때문이다. 한때 알곡이 영글면서 검게(북흑조) 물들기도 했던 벌판은 황금빛으로 통일됐다. 잃어버린 토종벼의 다양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근이 우보농장 대표가 꿈꾸는 들판이다. 그는 10년 넘게 토종벼를 재배하면서 토종벼 보급과 확산을 주도하고 있다. 2011년 5평 크기의 텃밭에서 토종벼 30품종을 재배하면서 토종벼의 아름다움에 빠진 그는 조금씩 규모를 키워 현재는 총 3만7000평에서 371품종의 토종벼를 재배 중이다. 혼자 하는 건 아니다. 2021년부터 토종벼 유전자원 연구개발에 나선 경기도 양평군과 함께하고 있다. 토종벼에 관심이 있는 시민들은 무보수로 참여해 모내기를 한다. 전국의 토종벼 재배 농가가 모여 정보와 종자를 나누기도 한다. 뜻있는 이들과 함께 토종벼로 만든 막걸리와 맥주 상품화에도 나설 계획이다.

지난 1월 3일 양평군 청운면 가현리 토종자원단지에서 그를 만났다. 비닐하우스 안에는 여러 이름표를 단 토종벼가 손목 굵기 정도로 묶여 걸려 있었다. 2021년부터 토종벼 절기 구독 서비스를 시작했다고 한다. 비닐하우스 한켠에 400g 단위로 포장된 상품이 일렬로 진열돼 있었다. 이근이 대표는 “대량으로 비료를 넣어 수확량만 늘린 쌀은 건강에도, 기후에도, 환경에도 좋지 않다”면서 “화학비료를 이용한 수량 중심의 농정의 틀을 일부라도 바꿔 유기적인 토종벼 농사가 가능한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근이 우보농장 대표가 1월 3일 경기도 양평군 토종자원단지에서 다양한 토종벼를 소개하고 있다. 주영재 기자

-토종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내 밥상에 오를 걸 내 손으로 직접 생산해보자는 생각에서 농사를 시작했다. 식탁의 중심은 쌀인데 토종쌀을 알게 되면서 정말 국가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토종벼는 1910년 이후부터 사라지기 시작해 1940년대 이후엔 거의 전멸됐다. 농촌진흥청 유전자원센터와 식량과학원 등에서 보존용으로 갖고 있으면서 육종에 일부 활용했을 뿐 그걸 증식해 농가에 권장하는 용도로는 쓰지 않았다. 일본 쌀이 맛있다는 선입견과 일본의 품종 개발이 앞서다 보니 그걸 그대로 따라갔다. 지금도 수량이 많지 않고 잘 쓰러지는데 왜 쓰냐라는 정도로 얄팍하게 이해하고 있다.”

-토종벼를 보급한 과정은.

“토종벼를 복원해 밥상에 올릴 때까지 최소 3년이 필요하다. 첫해 채종포(씨앗 받을 용도로 마련한 논)에서 50립 정도를 얻고, 이듬해 증식포에서 700g 정도로 양을 늘린 후에야 그다음 해부터 시험재배와 소량 공급이 가능하다. 땅에 적응해서 그 특성이 고정되는 단계까지 가려면 10년은 지켜봐야 한다. 지금은 유전자원센터에서 받은 451종 중 거의 전부를 복원했다고 본다.”

-토종벼의 특징은.

“2011년부터 토종벼를 심기 시작했다. 품종마다 개성이 강해 놀라웠다. 검거나 붉은 녀석도 있고 키도 제각각이고, 까락(이삭에 붙은 수염)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있었다. 북흑조라는 녀석을 봤을 땐 정말 이건 꼭 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볏대가 거의 대나무처럼 느껴질 정도로 굵고 빳빳해 기상이 느껴질 정도다. 토종은 농약과 화학비료로 키울 수 없다. 근본적으로 다르다. 키가 재배종보다 크기 때문에 비료를 주면 웃자라 넘어지기 쉽다. 그래서 유기적인 방식으로 키워야만 제 본질을 드러낸다. 기후위기 시대에 딱 맞다. 제값만 받는 구조가 마련되면 다품종 소량 생산으로 소농의 자립을 도울 수 있다.”

경기도 고양시 벽제 우보농장에서 촬영한 북흑조의 모습. 이예호/우보농장 제공

-주력으로 삼는 품종이 있나.

“개량종에 비해 맛과 수량, 병충해 저항성에서 떨어지지 않는 품종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걸 주력품종으로 정해 농가에 권장해 시험재배를 하고 있다. 양평군과 협력해 2021년 108개 품종을 심었고, 지난해에는 그중에서 추려서 45종을 재배 중이다. 토종벼 자체가 기계화가 안 되는 건 아니나 다양한 품종을 심다 보니 품종별로 열 평에서 한 평 정도밖엔 심지 못한다. 자발적으로 도시락 싸들고 와서 모내기를 함께해주는 도시 사람들의 도움이 크다.”

-토종벼가 맛이 없어 도태됐다는 시각도 있다.

“왜곡된 이야기다. 여러 품종의 토종쌀을 재배할 수 있게 되면서 제일 먼저 ‘테이스팅 워크숍’이라는 이름의 시식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 온 한 일본인 요리사가 ‘화도’를 맛본 후 깜짝 놀랐다. 고시히카리보다 맛있다고 평가했다. 화도는 까락이 붉은색이다. 벼꽃이 핀 후 출수기 이후의 논이 붉은색이다. 황금벌판이 아니라 붉은 벌판으로 비치게 된다. 대가 약해 잘 쓰러지니 키우기 어렵지만, 맛은 선호도가 굉장히 높다. 지금도 화도만 주문하는 요리사가 꽤 있다. 2021년 12월 양평군이 연 토종쌀 식미평가에서 블라인딩 테스팅을 했을 때는 1위가 토종벼인 귀도였다. 참드림이라는 재배종은 2위, 3위는 토종벼인 천주도가 차지했다. 10년 동안 토종쌀의 여운이 오래가고 풍미가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다만 수확량이 적어서 농부가 싫어하기 때문에 고가라는 점을 들어 설득할 수밖에 없다.”

-벼의 수매 가격도 낮은데 가능할까.

“지금 말린 벼를 기준으로 1㎏당 1500~2000원을 준다. 우리가 농가에 드리는 건 3500~4000원이다. 수확량을 포기한 대가다. 1평당 5000원 이상은 보장해야 한다. 유기농으로 건강하게 지어 소비자도 건강하게 먹게 하려면 그 정도는 보장해줘야 한다. 화학비료로 환경에 해를 입히는 농사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농부를 대접해야 건강하게 농사지을 수 있다.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농사를 지으려는 게 농부의 기본태도이다. 비싸게 유기농벼를 사준다면 농부가 굳이 비료를 쓰며 재배종을 키울 필요가 없다.”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가현리 토종자원단지에서 다양한 품종의 토종벼들이 재배되고 있다. 토종벼마다 키와 모양, 색깔이 조금씩 다르다. 우보농장 제공

-추천하는 토종쌀이 있다면.

“북흑조를 제일 많이 권장한다. 씹을수록 포만감이 느껴지고 묵직한 맛이 난다. 맛도 뛰어난데, 경관용으로 재배해도 좋다. 4년 전 새로 발견한 품종인 한양조도 추천한다. 이름을 보면 궁궐에서 쓰지 않았나 싶다. 원래 궁궐 진상용으로 자색 빛이 나는 자광도가 유명한데, 한양조는 그에 버금간다. 귀도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제사에 쓰던 쌀이다. 차진 맛이 으뜸이고 식감 또한 좋다. 전남 장흥의 한창본 농부가 육종한 적토미와 이영동 농부가 육종한 멧돼지찰벼도 추천한다.”

-토종벼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자기 씨앗을 갖는 게 중요하다. 농부는 죽을 때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고 했다. 씨앗을 이어서 심어야 한다는 뜻이다. 농사를 그렇게 배웠다. 토종이어야 이어서 심을 수 있다. 그게 토종을 하는 가장 큰 이유다. 내게 농부의 기준은 ‘당신 씨앗이 있느냐’이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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