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전에서, 김광석 못 잊는 사람들이 김광석을 노래하다
지난 6일 저녁 7시15분 ‘제1회 김광석 노래상 경연대회’가 열리기 직전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 기타를 멘 김광석의 흑백 사진 아래 향과 장미꽃, 소주 한병과 고량주 한병이 놓여 있었다.
이날은 1996년 같은 날 세상을 떠난 김광석의 기일이었다. 엠시(MC)로 나온 가수 박학기가 향에 불을 붙인 뒤 술 한잔을 따르며 경연은 시작됐다.
김민기가 이끄는 극단 학전은 김광석과 인연이 깊다. 1991~1995년 김광석은 학전에서 1000회 라이브 공연을 열며 한국형 라이브 콘서트 시작을 알렸다. 이곳에선 2012년부터 김광석 노래를 가창하는 ‘김광석 노래 부르기’ 대회가 열렸다. 올해부터는 ‘노래상 경연대회’로 넓혀 김광석 노래 한곡과 창작곡 한곡을 부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102팀이 지원한 예선을 뚫고 이날 본선엔 7팀이 올라왔다. 참가 팀 모두 무대에서 “떨린다”고 말하며 물을 연거푸 마시곤 했다.
2002년생 세명이 팀을 꾸린 ‘더2002’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부르기 전 에피소드를 얘기했다. “‘이 노래를 어떻게 표현할까’라고 고민하다 아버지에게 ‘서른이라는 나이는 어떻습니까’라고 여쭤봤어요. 아버지가 ‘서른 어리더라’고 하시는 거예요. 서른보다 더 어린 20대인 우리는 20대 감성으로 서른을 상상해보며 불렀어요”라고 했다.
또 다른 참가자인 권별은 창작곡 ‘꽃은 나무를 사랑했네’를 부르기에 앞서 “김광석님의 노래를 들으면서 ‘죽어서도 저렇게 누군가 내 노래를 불러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만든 노래”라고 소개했다.
참가자들은 ‘먼지가 되어’ ‘말하지 못한 내 사랑’ ‘바람이 불어오는 곳’ 등 김광석 노래를 불렀다. 또 ‘페이지’(소보) ‘이 밤’(김지성) ‘꽃은 나무를 사랑했네’(권별) ‘무화과’(오창석) ‘소야곡’(유태) ‘자장가’(이주영) ‘그리운 시간’(더2002) 등의 창작곡도 들려줬다.
90년대 세상을 떠난 김광석의 노래를 부르는 참가자들은 20~30대가 대부분이었다. 200석을 채운 관객은 12살에서 71살까지 다양한 세대가 함께 자리했다. 김광석 노래는 세대를 넘어서며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날 경연대회에 1등은 없었다. 따로 1등을 정하지 않은 것이다. 박학기는 “김광석은 ‘가요 톱10’에서 1위를 못 해봤어요. 하지만 우리 마음속에 김광석이 1등이잖아요. 그래서 이번 경연대회에서도 1등을 따로 정하지 않았어요”라고 했다.
대신 7개 이름으로 나눠 수상자가 나왔다. 김광석상(더2002), 다시부르기상(김지성), 가창상(유태), 연주상(소보), 편곡상(이주영), 작곡상(오창석), 작사상(권별)은 참가자 모두에게 돌아갔다. 김광석상 수상자는 상금 200만원과 마틴 기타를, 나머지 수상자는 상금 100만원과 파크우드 기타를 상으로 받았다.
심사위원은 극단 학전 대표 겸 김광석추모사업회 회장인 김민기, 성공회대 교수인 김창남 한국대중음악상(한대음) 선정위원장, 작사가 김광희, 가수 한동준·권진원, 동물원의 박기영, 유리상자의 박승화가 맡았다.
김창남 교수는 “권력에 맞서는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맞서는 기억의 투쟁”이라는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의 말을 가져와 심사 평을 했다. 김 교수는 “이 사회를 조금씩 더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잊지 않아야 할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이때 노래는 가장 강력한 기억의 무기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광석의 노래가 여전히 우리에게 끊임없이 소환되고 불리는 것이라고 봅니다”라고 했다.
이날 축하 무대엔 동물원이 섰다. 학전 개관 전인 1988년 샘터 파랑새극장에서 김광석과 동물원이라는 이름으로 공연했던 멤버들은 “35년이 지나서도 이곳 혜화동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축복인지 모르겠다”며 ‘혜화동’ ‘변해가네’ 두곡을 불렀다.
김민기는 “이 상이 앞으로 젊은 음악 창작인의 등용문으로서 든든한 발판이 되길 바랍니다. 서툴러도 좋으니 더 실험적인 음악이 나오길 기대합니다”라고 했다.
공연이 끝난 뒤 밖으로 나가자 하늘로 간 김광석을 그리워하듯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학전블루 소극장 마당에 세워진 김광석 노래비엔 꽃과 소주 등 고인을 기리는 물건이 놓여 있었다.
이어 참가자들과 심사위원이 함께한 뒤풀이가 학전블루 맞은편 호프집에서 열렸다. 김민기는 이 자리에서 김광석의 눈 아래를 조각해 만든 ‘김광석 노래상 경연대회’ 상패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김광석의 노래와 정신을 이어나가되 그의 눈높이에 맞추지 않고 그를 넘어서라는 의미를 담았어요.”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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