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광장] 부모의 어깨너머로 보는 영화가 열어주는 가능성
아버지는 영화를 좋아하셨다. 내가 초등 고학년이던 90년대 초 아버지는 대여 마감일인 3일을 꼬박꼬박 지켜가며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서 영화를 빌려 오셨다. 누나와 나는 새로운 영화가 도착하는 날에는 평소와 달리 영화가 끝나는 늦은 밤까지 TV를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등 뒤에 슬며시 앉아 부모님 어깨너머로 본 영화에는 당시 유행했던 영화도 있었지만, 대부분 '벤허', '십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왕과 나', '콰이강의 다리' 등 아버지가 어린 시절 보셨던 오래된 영화였다. 이 경험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깨너머 영화 보기가 나에게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줬음을 알 수 있었다.
일단 또래와는 결이 다른 경험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 내 나이대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영화는 주로 홍콩 영화로 강시가 등장하거나 주윤발이 총을 쏘거나 성룡이 등장하는 무술 액션영화였다. 어쩌다가 영화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으레 '너 그거 봤어?'라는 질문으로 시작되는 겨루기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때 아버지와 본 영화 중 몇 편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대부분 정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친구들 사이에서 '어려운 영화를 보는 애'로 이미지가 굳어지다 보니 은근히 뽐내기 좋았다. 간간이 친구 부모님 귀에도 이 소식이 들어가 어쩌다 마주치면 칭찬받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긍정적인 피드백 때문에 고전(古典)에 대한 가치를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었다.
둘째는 지루함에 견딜 수 있는 힘을 시나브로 단련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아버지와 본 영화들은 대부분 흑백영화인데다가 상영시간도 세 시간을 훌쩍 넘기다 보니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완주하지 못했다. 일단 옛날 영화를 빌려오셨구나 싶으면, 누나나 나나 딴짓을 할 수 있는 도구를 챙겨가곤 했다. 만화책을 옆에 깔아두고 읽으면서 만화책 너머로 흘끗거리면서 보거나 그림을 끼적이면서 눈에 들어오는 부분만 보곤 했다. 지루하면 졸다가 아예 잠이 들어버린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전체 줄거리를 이해하기보단 그냥 '벤허'하면 '마차 타고 싸우는 장면'처럼 나의 눈길을 오래 사로잡은 내용만 기억하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일수록 영화에 집중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게 됐다. 지루함에 내성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견디다 보면, 재미를 중심으로 단편적인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는 단계를 거쳐 재미있는 장면의 앞뒤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된다. 사건이 일어난 이유를 파악할 수 있게 되고 그 분량이 늘어나게 되자 점점 영화를 관통하는 서사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친구들과 주로 보던 홍콩 영화의 러닝타임은 대부분 90분에서 100분 사이였는데, 지루함에 단련되다 보니 두 배 이상의 분량을 가진 콘텐츠의 서사를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렇게 습득한 문해력이 지루하고 난해한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고전을 접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돌아보면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어렵지 않게 장편소설에 재미를 붙일 수 있었던 이유는 영화를 보면서 단련된 문해력 덕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버지가 됐다. 그리고 초등학교 4학년 첫째와 유치원생 둘째는 어린 시절의 나와 달리 언제든지 화면을 들고 다니며 원하는 영상을 골라볼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고 있다. 아이가 보는 영상의 길이는 대부분 10분 남짓에 하고 싶은 말만 욱여넣은 구성이 많다. 시간을 두고 '기승전결'의 순서로 내용을 풀어가기보다 압축에 압축을 거듭한 '전전전전'의 구성이다 보니 정보를 빨리 얻기는 쉬우나 서사를 파악하는 경험을 접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한 번 써먹어 봤다. 아이들이 TV를 볼 수 없는 평일 저녁 아빠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싶은데 같이 볼 생각이 있는지 물어봤다. TV를 본다고 신나서 모여든 아이와 함께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보았다. 중간중간 딴짓을 많이 했지만 아이들은 끝까지 1936년에 제작된 흑백영화를 버텨줬다. 그리고 나는 함께 볼 다음 영화를 열심히 고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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