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도, 요리도 못하는 무명 작가를 세계적 방송인 만든 5개의 묘약 [송의달 LIVE]
“나는 그녀를 보면서 삶의 목표를 세웠다. 그녀는 진정한 개척자였다.”(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나는 그녀가 세운 빛나는 모범에 영원히 감사한다.”(ABC방송 <굿모닝 아메리카> 진행자 로빈 로버츠)
지난달 30일 미국 뉴욕시 맨해튼 자택에서 93세로 영면(永眠)한 바버라 월터스(Barbara Walters·1929~2022)를 애도하는 조사(弔辭)의 일부입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틀동안 비즈니스섹션 미디어 코너에 그의 생애를 조명하는 장문(長文)의 기사 4건을 실었습니다. NYT는 오피니언면에 그녀의 경쟁자이자 후배인 캐티 쿠릭(Katie Couric)의 기고문도 실었습니다. 월터스는 어떤 삶을 살았길래 이런 대접을 받은 걸까요?
1929년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난 월터스의 아버지는 쇼 비즈니스 업계의 유명 인사였습니다. 그의 이름을 딴 ‘루 월터스(Lou Walters) 거리’가 뉴욕 맨해턴에 지금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집안은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리고 이사도 자주하는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32세에 무명 작가로 입문...‘유리천장’ 깨
아버지를 따라 극장과 무대에 낯 익었던 월터스는 유명 스타들도 실제로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았습니다. 이런 깨달음은 내성적이던 그녀가 TV카메라 앞에서 세계적 명사(名士)들과 주눅들지 않고 인터뷰할 수 있는 힘이 됐습니다.
원하던 명문대를 못 가고 평범한 여자 대학을 다닌 월터스는 세 살 위의 정신박약아인 친언니를 돌보면서 참고, 경청하며, 공감하는 법을 익혔다고 합니다. 월터스는 졸업 후 우편물 주문회사, 광고대행사 등을 거쳐 32세때인 1961년 NBC방송 <투데이(Today)> 쇼의 작가 겸 조사요원으로 방송계에 입문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작가 8명 중 유일한 여자로서 매일 새벽 4시에 나와 인터뷰 섭외를 하고 대본·질문지를 썼습니다.
궂은 일도 마다않던 월터스는 전날 과음(過飮)으로 결근한 여자 보조앵커의 대타로 우연히 마이크를 잡았다가 기대 이상의 매끄러운 진행으로 1964년 10월부터 <투데이> 쇼의 고정 출연자가 됐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방송계는 남성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지배하던 정글 같은 곳이었습니다. 여성 방송인은 똑똑해선 안 되고, 글래머여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월터스는, 남자 진행자가 질문 3개를 마친 다음에야 질문한다는 ‘3개 질문 규칙(a three-question rule)’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녀는 좌절과 유혹을 견뎌내고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시 유일한 여성 방송인으로 동행 취재단에 포함됐습니다. 1974년에는 미국 방송사상 최초로 여성 공동 진행자가 됐고 이듬해 생애 처음 에미상(Emmy Awards)을 받았습니다. 그때 48세였으니 ‘늦깎이’에 가까웠습니다.
1976년에는 경쟁사인 ABC방송의 <이브닝 뉴스(Evening News)> 공동 앵커로 발탁돼 황금시간대 방송 뉴스를 진행하는 첫 여성 앵커가 됐습니다. 월터스는 당시 ABC방송과 5년간 500만달러 계약을 맺었는데, 연봉(年俸) 기준 100만달러(2022년 말 가치로 525만달러)는 남녀를 통틀어 방송계 최고였습니다. 이는 남성이 뉴스 진행을 독점하던 무렵, 여성에게만 가해진 ‘유리 천장(Glass ceiling)’을 깬 파격이었습니다.
월터스는 52세인 1979년부터 ABC방송의 뉴스매거진 프로그램인 ‘20/20′ 진행을 맡았고, 68세인 1997년에는 낮 시간대 여성 토크쇼 <더 뷰(The View)>’란 프로그램’을 새로 출범했습니다. 2014년 은퇴할 때까지 <더 뷰>의 책임 프로듀서(executive PD)를 맡았습니다. 그녀는 나이 들수록 더 강한 집중의 에너지와 혁신력을 발휘했습니다.
◇85세까지...맡은 프로마다 새 기록 쓴 ‘개척자’
그녀는 미국 방송 역사상 저녁 프라임 타임 뉴스를 진행한 최초 여성 공동 앵커, 최초 메인뉴스 여성 앵커, 시사 매거진 <20/20>의 스타 앵커, 매번 시청률 최고를 경신한 <스페셜(Special)>, <더 뷰>의 PD 겸 진행자로 맡은 곳마다 새 기록을 썼습니다. 그래서 ‘개척자(trailblazer)’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85세이던 2014년까지 54년간 현역으로 활동한 그녀는 퇴임 후에도 <20/20> 특집과 다큐멘터리 시리즈 제작에 참여했습니다. 2015년 11월 20일 밤 <20/20>에 방영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예비후보 부부(夫婦) 인터뷰가 그녀의 마지막 방송이었습니다.
월터스의 가장 큰 강점은 ‘특종 인터뷰’, 즉 인물 저널리즘(personality journalism)입니다. 그녀는 1976년 시작한 <바버라 월터스 스페셜(Specials)> 인터뷰 등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첫 대상자는 지미 카터 대통령 당선인 부부였습니다.
1977년 6월과 11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특종 인터뷰 등으로 월터스 본인도 세계적 명사(名士)가 됐습니다. 1979년부터 2004년까지 진행한 <20/20>, 1993년 출범한 <10명의 가장 뛰어난 사람들(Barbara Walters’ 10 Most Fascinating People)>, <더 뷰> 같은 프로그램에서 직접 만난 유명인만 수백 명이었습니다.
지미 카터부터 버락 오바마까지 모든 미국 대통령 부부(夫婦)와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대통령,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 마이클 잭슨….
그녀는 ‘TV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맹렬하게 돌진해 1975년·2003년·2009년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의 에미상(賞)을 받았습니다. 수상 후보자로는 15번 넘게 지명됐습니다. 1989년에는 ‘TV명예의 전당’에 헌액(獻額)됐고, 2007년에는 그녀의 이름 등이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Walk of Fame)에 새겨졌습니다.
무엇이 밑바닥 무명 작가이던 바버라 월터스의 운명(運命)을 세계 최고 방송인으로 바꾼 걸까요? 적어도 다섯 가지 측면에서 ‘묘약(妙藥)’ 같은 기법으로 그녀는 매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군계일학(群鷄一鶴·여럿 가운데 가장 뛰어남) 수준의 ‘인터뷰 작품’을 내놓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월터스의 ‘운명’ 바꾼 5가지 인터뷰 기법
먼저 그는 끈질기고 집요했습니다. 그룹 비틀즈의 멤버인 존 레넌을 살해한 마크 채프먼에게 12년간 편지를 보낸 끝에 교도소내 인터뷰를 성사시킨 게 대표적입니다. 카스트로와의 인터뷰를 위해서는 2년 동안 거의 매주 연락하며 공을 들였습니다.
인터뷰가 결정되면, 상대방이 누구든지 ‘돌직구 질문’을 가차없이 던지는 것도 그의 특기였습니다. 소련 비밀경찰 출신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는 “사람을 죽인 일이 있느냐”, 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대통령에게 “사람들은 당신이 미쳤다고 생각하는데, 당신 생각은?”, 영화배우 숀 코너리에게 “정말 여자는 때려도 된다고 생각하냐”고 물었습니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에게 “왜 코를 성형수술 하지 않나”, 팝 스타인 릭키 마틴에게 “당신은 동성애자 아닌가”라고 다그쳤습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스캔들을 벌인 전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단독 인터뷰에서는 “일부러 재킷을 들어올려 대통령에게 끈 팬티를 보인 게 맞느냐”, “클린턴은 진짜 육감적(肉感的)이었나”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상상을 초월하는 준비입니다. 그녀는 보통 200개 넘는 질문을 만들었는데, 이를 위해 상대방의 은밀하고 아픈 구석까지 철저하게 연구·분석했습니다. 특히 어린 시절이나 부모와 얽힌 얘기를 갑자기 꺼내 상대를 무장해제(武裝解除)시키는 수법을 썼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홀린듯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았습니다.
1991년 3월 걸프전 영웅(英雄)인 노먼 슈워츠코프 대장도 그의 아버지에 대한 월터스의 질문에 넘어가 인터뷰 도중 울먹였습니다. 미국 방송계에서는 “월터스는 꼭 (인터뷰 대상자의) 눈물을 보고야 만다”는 말이 회자됐습니다.
네번째로 ‘뉴스’와 ‘쇼’를 혼합해 인터뷰 방송 효과를 극대화했습니다. ‘연예 기자들보다는 뉴스 같이, 취재 기자들보다는 쇼 성격을 가미’하는 자신 만의 방식을 고수했습니다. 미국 프로농구 스타인 샤킬 오닐과 24초 동안 직접 농구를 하는가 하면, 1977년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인터뷰 취재에선 새벽 1시 카스트로가 자신의 주방에서 요리한 치즈 샌드위치를 같이 먹는 장면도 촬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후속 질문(follow-up questions)’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고수(高手) 인터뷰어는 상대방의 답변에 고개만 끄덕이지 않고 후속 질문을 계속해 대답의 진위(眞僞)와 대상자의 진면목을 가려 내는데, 월터스는 여기에 충실한 것입니다. 1981년 캐서린 헵번(Katharine Hepburn)과의 인터뷰 대화입니다.
월터스 : 당신의 노년은 어떤가요?
헵번 : ‘강한 나무(a very strong tree)‘ 같다고 느껴요.
월터스 ; 그래요! 어떤 종류의 나무인가요?
헵번 : (….) 느릅나무(elm) 보다 오크(oak)나무면 좋겠어요.
월터스 : 왜 그런가요?
헵번 : 오크나무는 느릅나무 병(Dutch elm disease)에 걸리지 않으니까...
◇유명 인사들과 염문...세 번 결혼 모두 이혼
월터스는 2008년 낸 자서전 <오디션(Audition)>에서 유명 남성들과의 밀회(密會) 사실을 털어놨습니다. 나중에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 의장이 된 앨런 그린스펀, 연방 상원 군사위원장을 지낸 5선의 존 워너 상원의원이 연인(戀人)이었습니다. 1970년대에 유부남(有婦男) 흑인인 에드워드 브루크 연방상원의원과의 불륜(不倫) 사실도 실토(實吐)했습니다.
하지만 월터스는 3명의 남자와 결혼했다가 모두 이혼하고 3번의 유산(流産)을 겪었습니다. 직계 가족으로는 입양한 딸 재키 1명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훌륭한 경력과 멋진 결혼, 좋은 자녀 등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인터뷰를 책 또는 영화 홍보용으로 이용해 입방아에 올랐고, 시리아 독재자인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을 편드는 인터뷰로 비판받았습니다. 그녀는 일부 실수와 잘못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습니다.
딸 재키는 “엄마는 운전 면허증이 없었고 요리도 젬병이었다. TV 밖에는 잘 하는 게 없다”고 했습니다. 월터스는 공짜로 ‘인터뷰의 여왕’ ‘세기의 방송인’으로 상찬(賞讚)받은 게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소질, 즉 피와 눈물과 땀방울을 방송에 남김없이 쏟아부은 결과였습니다.
바버라 월터스 보다 두 살 아래로 CBS방송의 전설적인 앵커인 댄 래더(Dan Rather)는 “월터스는 경쟁자들보다 더 많이 일했고, 더 많이 생각했고, 더 많이 뛰었다(outworked, outthought and out-hustled her competitors)”고 했습니다.
월터스의 노력은 한 개인의 직업적 성공을 넘어 미국 방송 저널리즘의 수준과 품격을 몇 단계 높였습니다. 권력자와 유명 인사들을 두려움 없이(fearless), 독립적(independent)으로, 정면으로 파고들고 문제제기함으로써 더 깊이있고 권위있는 저널리즘의 지평을 그녀는 활짝 열었습니다. 월터스의 자세와 접근법은 미국 저널리스트들에게 역행(逆行)할 수 없는 ‘탁월함의 새로운 표준(a new standard of excellence)’이 됐습니다.
◇“책임감과 절박감으로...긴 오디션 본 기분”
하지만 월터스는 “내가 정상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인터넷뉴스 시대라는 게임이 시작되기 전에 출발한 덕분이다. 나는 정말 운(運)이 좋았다”고 겸손해 했습니다. 캐티 쿠릭이 2011년 펴낸 <내가 받은 최고의 조언(助言)>에서 바버라 월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하면 돈을 받지 못하더라도, 직위를 따지지 말고 시작해라. 아침에 가장 먼저 출근하고 밤에 가장 늦게 퇴근해라. 커피 심부름도 해라. 너의 축복을 따르라. 그러나 상사(上司)와 잠자리는 갖지 마라. 당신은 성공할 것이다.”
하버드대와의 인터뷰에서 언론인의 가장 중요한 자질로 ‘호기심(好奇心)’을 꼽은 월터스는 ABC뉴스 다큐멘터리 ‘우리의 바버라(Our Barbara)’에선 “인터뷰 대상보다 더 깊이 그를 연구하고, 질문은 수백 개 준비하고, 질문지를 버려야 한다면 그럴 수 있도록 완벽하게 숙지했다”고 했습니다.
월터스는 자서전에서 “장애를 앓던 세 살 위 언니와 가족의 생계에 대한 책임감과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절박감’, 실패하면 안 된다는 ‘두려움’으로 살았다”고 회고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긴 오디션을 한번 받았다는 기분이 든다. 그 오디션을 통해 나는 남보다 뛰어나려 애썼고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습니다. ‘오디션’을 보는 심정으로 인생 전체를 분투·분발로 일관했다는 자기고백입니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그녀가 맨 마지막에 던진 질문은 항상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요?(How do you want to be remembered?)”였습니다. 바버라 월터스가 평생 보여준 근성과 열정, 프로페셔널로서의 혼(魂)은 세계 저널리즘에 불멸(不滅)의 기둥으로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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