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부활하는 美 영웅, 잊히는 韓 영웅
美 정부는 최고 예우로 보답
영웅의 생명력은 기억에 비례
殺身成仁 우리 영웅도 소환을
‘메달 오브 아너(Medal of Honor)’는 미국 정부가 군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무공훈장이다. 1863년 첫 수훈자가 나왔고 지금까지 3500여 명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수훈자에 대한 존경과 예우는 파격적이다. 백악관으로 초청해 대통령이 직접 훈장을 수여한다. 사병 출신이라도 수훈자를 향해 계급에 상관없이 먼저 거수경례해야 한다. 대통령은 물론 현역 장성도 예외가 없다. 연금과 의료보험 혜택을 주고, 특별 제작한 자동차 번호판도 달아준다. 국가 공식 행사에 귀빈으로 초청하고, 공공장소나 기관은 그의 방문 사실을 알린다. 시민들은 수훈자에게 박수를 치고 고개를 숙이며 군인으로서의 용맹함과 공동체를 위한 희생정신에 존경과 감사의 뜻을 아낌없이 전한다.
2014년 9월 15일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거행된 훈장 수여식은 그중 특별했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70년 1월 17일 적군의 부비트랩에서 굴러온 수류탄을 몸을 던져 막아낸 기관총 사수 돈 슬로트(Sloat) 상병을 기리는 자리였다. 동료 수십 명의 목숨을 구하고 장렬히 산화한 그는 당시 스무 살이었다. 형을 빼닮은 초로의 동생이 액자에 담긴 훈장을 말없이 받았다.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은 “전장의 안개와 시간의 흐름 속에 전공(戰功)이 잊힐 수 있다”며 뒤늦은 훈장 수여에 대한 유감을 전한 뒤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용사들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우리에게도 동료의 목숨을 구하고 살신성인(殺身成仁) 정신을 실천한 영웅이 여러 명 있다. 1965년 10월 4일 베트남전 파병을 앞두고 중대원과 훈련 중 한 병사가 안전핀을 뽑은 채 놓친 수류탄을 몸으로 덮쳐 순직한 강재구 소령이 대표적이다. 1966년 8월 11일 해병 청룡부대 정보장교로 베트남전에 참전해 동굴 수색 작전을 벌이다 베트콩이 던진 수류탄을 가슴에 안고 전사한 이인호 소령, 1966년 2월 4일 공수특전단 고공 침투 낙하 조장으로 한강 백사장 4500피트 상공에서 강하 훈련 중 기능 고장을 일으킨 병사의 낙하산을 펴주고 언 땅 위에 추락해 순직한 이원등 상사도 있다. 미국과 차이가 있다면 영웅들의 뜨거운 의기(義氣)가 후대에 충실히 전해지지 못하고 잊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강 소령의 일화는 1970년대 ‘아! 중대장님!’이란 제목으로 6학년 바른생활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지금도 육군사관학교에서는 입교를 앞둔 생도들이 고된 기초 훈련을 마무리하며 촛불을 밝히고 강 소령의 희생정신을 계승하는 ‘재구 의식’을 거행한다. 입학한 뒤에는 매주 금요일 ‘내 나라 내 겨레 위해서라면, 재구처럼 이 목숨 아끼지 않으리’라는 ‘재구가’를 부르며 교정을 행진한다. 하지만 요즘 보통 젊은이 가운데 강재구 이름 석 자를 들어본 이가 얼마나 될까. 한강대교 노들섬에는 ‘낙하 준비 완료’를 알리며 엄지손가락을 힘차게 치켜든 이원등 상사의 동상이 있다. ‘바람 찬 창공을 끊어, 죽음의 부하를 구하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지만, 그를 기억하는 이는 또 얼마나 될까.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년을 그린 영화 ‘영웅’이 최근 개봉 18일 만에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지난해 8월 나온 김훈의 소설 ‘하얼빈’은 지금까지 30만부 가까이 팔렸다고 한다. 자신의 안전을 뒤로하고 초개처럼 목숨을 바친 영웅의 생명력은 훗날 그의 뜻을 기리며 함께 펴나가는 사람들에 비례한다. 미국은 44년 만의 최고 훈장으로 ‘기억의 힘’을 보여줬다. 전사(戰史)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영웅들이 품었던 정신을 오늘에 새로이 되살릴 때 우리가 진정 먼저 떠난 이들을 제대로 대접했다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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