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462] 장소의 논리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2023. 1. 10. 03: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 의해 수정되어 본문과 댓글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이건용, 장소의 논리, 1975년 초연. /ⓒ이건용, 갤러리현대 제공

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 이건용(1942~)은 1975년부터 대단히 단순한 동작을 통해 작가의 의도를 명료하게 전달하는 행위 예술을 ‘이벤트’라고 명명하고 활동해왔다. 그중 ‘장소의 논리’는 작가가 운동장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일어서면서 시작된다. 작가는 원 밖에 서서, 원의 중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라고 말하고, 원 안으로 한 발자국 걸어 들어가 중앙에 선다. 이번에는 발밑을 향해 ‘여기’라고 말하고, 원 밖으로 나가 원을 등지고 선다. 이제는 등 뒤에 있는 원을 향해 어깨 너머로 손가락을 들어 ‘거기’라고 말한다. 다시 뒤돌아 원을 향해 서서 같은 동작을 반복한 뒤, 원주를 따라 맴돌면서 ‘어디, 어디, 어디’를 묻는다. 그렇게 동그랗게 한 바퀴 돌면 이벤트는 끝이다.

이건용은 자리를 수차례 바꾸는 동안 줄곧 똑같은 원의 중심을 가리켰다. 물론 원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작가의 위치에 따라 ‘저기’가 됐다가 ‘여기’가 됐다가 ‘거기’가 됐다. 떨어져서 보면 ‘저기’이고, 가까이서 보면 ‘여기’인데, 지나치고 나면 ‘거기’가 되고 뒤돌아서면 다시 ‘저기’가 아닌가. 그러니 만약 사람들이 여럿 있다면, 틀림없이 같은 걸 가리키는데도 서로 서 있는 자리가 달라질 때마다 완전히 다른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이들이 제각각 어디 서서 말하는지를 제대로 보지 않으면 여기가 어디이고 거기는 또 얼마나 먼 곳인지 알 수도 없다.

이건용은 이처럼 누구나 알고 있는 당연한 이치를 동작으로 뚜렷하게 보여주면서 언어의 구조와 세상의 논리, 의미의 진실성에 대한 신선한 깨달음을 준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