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입자들, 집주인 채무 정보 알수없어 전세사기 피해 커졌다[인사이드&인사이트]

전혜진 기자 2023. 1. 10.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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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울린 ‘빌라왕’ 대책은
전셋값 단기 급등 상황 악용… 빌라 수천채 사들여 사기
사회 초년생들 피해 많아… 전입신고 당일 매매하거나
등기 미뤘다 전입후 바꾸기도… 일부 중개사 “걱정말라” 동조
체납액 확인 제도 개선됐지만, 임대인 변경 고지 의무화 절실
빌라왕, 빌라의 신, 건축왕….

언뜻 보기엔 부동산 사업으로 거액을 번 사람을 지칭하는 것 같지만 이들은 모두 서민을 울린 전세 사기 용의자들이다. 자기 자본은 거의 투입하지 않고 ‘깡통전세’를 많게는 수천 채까지 사들이며 세입자들의 보증금으로 돌려막는 수법을 썼다.

전세 가격이 매매 가격에 육박하거나 넘어서는 경우를 ‘깡통전세’라고 부른다. 이 경우 경매로 주택을 처분하더라도 보증금을 회수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전세 사기에 걸려든 피해자 중에는 부동산 계약 경험이 부족한 대학생과 신혼부부 등 사회 초년생이 많다.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경우 현재로선 살던 집이 경매에서 낙찰돼야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 그마저도 임대인의 체납 세금이 많은 경우 전세 사기 피해자들에 대한 보증금 반환은 후순위로 밀려나게 된다.》
○ 단기간에 전셋값 급등하자 사기 피해 늘어

직장인 황모 씨(43)는 2021년 3월 인천 부평구의 한 신축 오피스텔에 입주했다. 집주인은 “오피스텔 매매가 어려워 전세를 놓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간다”고 했다. 전세가가 매매가와 같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이 가격에 이만한 집이 없다”는 부동산 공인중개사 말에 황 씨는 계약을 결심했다.

그런데 입주하기 이틀 전 부동산으로부터 집주인이 바뀌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황 씨는 “매매가 어렵다고 했는데 어떻게 집주인이 바뀌었는지 의아했지만 부동산에서 전세 계약 조건은 동일하다고 해 계약을 유지했다”고 말했다. 황 씨의 새 임대인은 전세 사기로 300억 원이 넘는 보증금을 가로챈 혐의를 받는 ‘빌라왕’ 김모 씨였다.

전세 사기 범죄는 전셋값이 단기간에 급등한 부동산 시장 상황을 악용해 벌어졌다. 특히 아파트 전세를 구하기엔 돈이 부족한 사회 초년생들이 빌라로 눈길을 돌리면서 수도권 빌라와 오피스텔을 중심으로 전세 보증금이 매매가를 웃도는 경우가 생겼다.

전세 사기 피해를 입은 강모 씨(31)는 “2020년 9월 집을 구할 때 신혼부부라 경기도 신축 빌라 위주로 알아봤는데 빌라 전셋값이 1억 원대 후반∼2억 원대 초반 정도였다”며 “2억2500만 원에 전세 계약을 했다. 2018년만 해도 비슷한 지역에서 아파트를 살 수 있었던 금액인데 가격이 더 오를까 봐 급한 마음에 서둘러 계약했다”고 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평균 전세 가격은 2018년 1월 4억3905만 원에서 2021년 1월 4억8635만 원으로 3년 만에 5000만 원 가까이 올랐다. 같은 기간 빌라 평균 전세가는 1억7102만 원에서 1억8234만 원으로 약 1100만 원 올랐다. 2018년 1월까지만 해도 2억 원 안팎이면 서울 외곽 지역의 소형 아파트 전세를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파트 전세 가격이 급등하면서 상대적으로 덜 오른 빌라로 눈을 돌리는 이들이 늘었다.

상대적으로 저렴하면서 교통편이 좋은 신축 빌라 수요가 늘자 전세가가 매매가에 육박하기 시작했다. 신축 빌라를 지은 뒤 분양하지 않고 전세만 내주더라도 공사비를 내고도 목돈을 손에 쥘 수 있게 된 것이다. 전세 사기범들은 이 같은 상황을 악용해 세입자들의 보증금으로 돌려막기를 하는 ‘나쁜 돈벌이’를 설계했다.
○ 슬그머니 집주인 바뀌고, 체납 내역도 깜깜이

세입자가 확인할 수 있는 정보가 제한적이라는 점도 피해를 키운 요인이다. 현행법상 임대인이 변경되더라도 세입자에게 알릴 의무가 없다 보니 주기적으로 등기부등본을 살펴보지 않는 이상 집주인이 바뀌었는지 알 수 없다. 등기부등본으로는 집주인의 세금 체납 내역도 알 수 없다. 체납 여부를 알기 위해선 임대인 동의를 받은 후 납세 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한다.

2021년 10월 경기도의 한 빌라에 전세로 입주한 오모 씨(31)는 이사한 지 보름 만에 주택도시보증공사(HUG)로부터 임대인이 바뀌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오 씨는 “보증보험이 가입되지 않거나 안심 전세대출이 안 되는 집은 처음부터 검토하지 않았고, 계약할 때도 등기부등본을 검토해 전세금을 보전할 수 있는 특약을 넣었다”고 했다. 하지만 빌라왕 김모 씨가 지난해 10월 사망하면서 계약 해지를 통보할 대상이 사라졌다. 김 씨 가족이 상속을 포기하면서 반환보증이 이행되려면 상속 포기 및 법원의 상속관리인 지정이 이뤄져야 하는데 이 절차만 6개월 이상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피해자들은 빌라와 오피스텔의 경우 아파트와 달리 객관적 시세 비교가 어려워 피해를 막을 수 없었다고 입을 모은다. 20대 전세 사기 피해자 임모 씨는 “세입자가 알 수 있는 정보는 등기부등본뿐이라 사기 조직이 ‘바지 사장’에게 비싸게 팔았더라도 이 같은 사실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2020년 11월 전셋집을 계약한 이모 씨(33)도 “부동산에서 매매가가 전세가보다 2000만∼3000만 원 정도 더 높다고 얼버무렸지만 신축 빌라라 정확하게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 세입자가 계약 전 깡통전세 위험성을 판단할 수 있는 정보가 부족하다 보니 사기 조직과 공모한 공인중개사나 분양 대행업자에게 휘둘리기 쉬울 수밖에 없다.
○ 교묘해진 사기 수법 막으려면 제도 개선해야

수법도 교묘해졌다. 최근 전세 사기 일당은 매매와 전세를 동시에 진행하는 ‘동시진행’ 수법을 썼다. 세입자가 전입신고를 한 다음 날부터 법적 대항력이 생긴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신고 당일 악성 임대인으로 집주인을 바꾸거나, 매매 후에도 등기를 미루다 세입자가 전입한 후 임대인을 바꾸기도 했다.

전세 사기 피해자 이모 씨는 “전입신고 후 집주인이 ‘빌라왕’으로 바뀌었는데 등기부등본을 확인해 보니 매매 날짜가 입주 전이었다”며 “전 집주인이 악성 임대인에게 집을 팔아 놓고 등기를 미뤘던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제도 개선에 착수했다. 지난해 12월 국세기본법 및 국세징수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올 4월부터는 세입자가 집주인 동의 없이도 집주인의 세금 체납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임대인이 바뀐 사실을 세입자가 알기 어려운 구조는 여전하다. 전세 사기 소송을 다수 진행해 온 법무법인 제하의 박소예 변호사는 “최소한의 고지 의무를 부여하고 임대인이 변경될 경우 임차인이 계약 승계를 거절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정부에서 전세 사기 피해를 전수 조사해 한시적으로 관련 세금을 면제해주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피해 예방을 위해선 세입자도 사전에 가급적 많은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시세를 정확히 알기 어렵다면 계약 체결 전 여러 공인중개사사무실을 방문해 가격을 직접 비교해야 한다”며 “특히 전세보증금이 매매 가격의 70%를 넘는 ‘깡통 전세’는 아닌지 여부를 집중적으로 살펴야 한다”고 했다.

전혜진 기자 sunrise@donga.com
손준영 기자 han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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