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국의 아포리아]전쟁의 공포와 다문화주의 쇠퇴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2023. 1. 10.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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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국 교수

[편집자주] 아포리아는 그리스어의 부정 접두사 아(α)와 길을 뜻하는 포리아(ποροσ)가 합쳐져 길이 없는 막다른 골목, 또는 증거와 반증이 동시에 존재하여 진실을 규명하기 어려운 난제를 뜻하는 용어. '김남국의 아포리아'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에 대해 지구적 맥락과 역사적 흐름을 고려한 성찰을 통해 새로운 해석과 대안을 모색한다.

국제 정세에서 고립주의 흐름이 뚜렷해지고 전쟁의 공포가 커질 때 안전에 가장 위협을 받는 사람은 외국인노동자를 비롯한 외국인주민들이다. 지구화에 따른 문화적 소수의 빠른 증가 및 민주주의 발전에 따른 평등의식 고양과 더불어 다양성이 존중받는 다문화주의 확산은 불가역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평화가 유지되고 안보위협이 감소할 때 진전을 보이던 다문화주의는 세계 정세가 불안정하고 이웃국가와 갈등이 깊어질 때는 주춤거린다.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다문화 수용성 저하 경향은 힘든 취업과 치열한 경쟁을 겪는 20대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젊고 고학력일수록 개방성과 다문화 수용성이 높던 일반적인 추세도 무너지고 있다. 동아시아연구원의 한국인의 정체성 조사에 따르면 2010년 60%에 이르던 다민족·다문화 국가로의 이행에 대한 지지는 2015년 49%, 2020년 44%로 줄었다. 평화가 지속되던 시기와 달리 전쟁의 위협이 커질 때 점차 많은 원주민은 외국인주민을 안보의 위험세력으로 간주하고 경계하기 시작한다.

'진정한 한국인'의 조건 역시 협소해지고 있다. 2020년 조사결과는 한국에서 태어나야 하고(89.7%) 한국인의 혈통을 가지며(81.1%) 한국 국적을 유지하면서(95.2%) 생애 대부분을 한국에서 살고(80.8%) 한국어를 사용하며(91.8%) 한국의 정치제도와 법을 지키고(94.3%) 한국역사를 이해하고 전통과 관습을 따르는(89.4%) 것이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이 지표들은 2005년 조사와 비교할 때 대부분 상당폭 상승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전체 인구의 4.1%인 220여만명의 외국인주민이 있고 이 수치는 코로나 위기 이전보다 30만명 정도 줄어든 것이다. 외국인주민의 33%는 경기도에 살고 20% 정도가 서울시에 산다. 경기도에는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에서 온 외국인노동자, 외국인주민 자녀 비율이 높고 서울시에는 유학생과 외국 국적의 동포 비율이 높다. 그러니까 경기도는 30대 외국인주민 자녀 및 가족관련 정책에 대한 수요가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코로나 위기와 이태원 참사를 겪으면서 외부의 군사적 공격보다 내부의 자연재해와 안전사고, 전염병 등에 따른 위험이 더 심각하게 공동체의 안보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따라서 군사적 수단을 중심으로 국가를 보호하는 국가안보에서 사고나 질병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인간안보로의 초점이동은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국제사회는 국경을 넘어 인간의 생명, 안전, 생태를 보호할 책임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 뚜렷해진 것이다.

그러나 지역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개인의 시각에서 성찰할 필요성과는 정반대로 미중 패권경쟁의 격화와 파괴적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속에 세계 정세는 급속히 국가 중심으로 재편된다. 지구화의 진전과 함께 20세기가 국가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도시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군사적 수단을 동원해 주권과 영토수호를 다투는 근대국가 시대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전쟁의 공포를 키우는 국제 정치의 위협적 거대담론을 이겨내고 우리 삶의 미시적이고 소중한 부분들을 지켜내야 한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이뤄지는 공간으로서 지역의 중요성을 깨닫고 개인들이 지역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참여하고 연대함으로써 공동체 구성에 기여해야 한다. 당연히 외국인주민도 우리 공동체의 주요 주체로서 정체성을 결정하는데 참여해야 하고 차별 없는 평등과 함께 다양성이 가져오는 기회가 우리 사회를 더 평화롭고 풍요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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