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하는 ‘삶의 아름다움’ 선물해준 재춘언니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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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새해를 맞아 저마다 덕담을 주고받을 때 한줌 뼛가루가 되어 고향 땅으로 돌아간 이가 있습니다.
대전 콜텍에서 일하다 정리해고 된 뒤 13년간 천막 농성을 했던 임재춘.
그럼에도 임재춘은 고달픈 인생을 사는 동안 많은 이들에게 기억할만한 선물을 남겨주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임재춘과 동료들이 정리해고 5년째 결성한 '콜밴'의 음악 또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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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새해를 맞아 저마다 덕담을 주고받을 때 한줌 뼛가루가 되어 고향 땅으로 돌아간 이가 있습니다. 대전 콜텍에서 일하다 정리해고 된 뒤 13년간 천막 농성을 했던 임재춘. 1962년 여름에 태어나 2022년 겨울 끝자락까지 고단했던 60년 한 세월을 살다가 거짓말처럼 갑자기 세상을 떠난 그는 남겨진 이들에게 커다란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지만 존중받지 못한 노동자 임재춘은 기타를 만드는 공장에서 30년 근무했음에도 돌아온 것은 편안한 노후 대신 정리해고와 생활고였지요. 이렇게 어긋나버린 시간에 그는 투쟁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2006년 몇 달이면 끝날 줄 알았던 그 투쟁은 13년이나 지속되었고, 자식들을 돌보지 못하는 건 물론 쌓여가는 빚, 가까웠던 이들의 곱지 않은 시선까지 견뎌야 했지요. 그럼에도 임재춘은 고달픈 인생을 사는 동안 많은 이들에게 기억할만한 선물을 남겨주었습니다.
첫 번째는 음악이에요. 웬만한 뮤지션이라면 콜트(Cort) 기타의 추억을 갖고 있죠. 하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기타가 창문도 없는 공장에서 유기용제를 맡아가며 지문이 문드러질 정도로 ‘뻬빠질’(사포질)을 하고 호흡기,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렸던 노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실은 잘 알지 못했다지요. 실제로 많은 뮤지션들이 김성균 감독의 <기타 이야기>에서 뒤늦게야 알게 됐다고 고백합니다. 전유진 음악감독은 임재춘의 손을 거쳐 완성된 오래된 콜트 기타로 연주한 곡을 영화 <재춘언니>의 콜텍 공장 장면에 배치하여 더욱 먹먹해지기도 했고요. 우리에게는 임재춘과 동료들이 정리해고 5년째 결성한 ‘콜밴’의 음악 또한 남아 있습니다. 기타를 만들기만 하다가 정리해고 된 뒤에야 비로소 칠 수 있게 된 기타로 연주하는 음반. 투쟁 3000일째에는 열흘간 전국 음악투어를 하여 세월호의 팽목항, 강정마을, 밀양, 두물머리 뿐 아니라 차별 없는 세상, 인권과 평등, 생명 평화를 위해 싸우는 전국 곳곳의 현장에서 콜밴의 노래가 울려 퍼졌지요.
두 번째는 밥입니다. 임재춘은 어린 시절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동생들과 아버지에게 밥을 해주었다고 들었어요. 직장폐쇄로 닫힌 인천 콜트악기의 폐공장으로 투쟁하러 올라올 때 그는 다른 건 못 해도 밥은 잘 할 수 있다며 주방 일을 자처했다죠. 덕분에 '잘 먹고 잘 싸우자'는 글씨가 커다랗게 붙어 있던 폐공장 뒤편 공간에서 열리던 문화제에 많은 사람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올 수 있었고, 이웃집 예술가들 역시 그 밥을 먹고 힘을 낼 수 있었어요. 천막 농성할 때도 작은 텃밭에 심은 채소들로 비빔밥을 해먹고, 어떤 이들은 '임셰프'가 손수 지은 따뜻한 밥이 먹고 싶어 농성장을 찾기도 했어요. '평등한 밥상'에 놓였던 그 밥을 투쟁하는 노동자 뿐 아니라 가난한 예술가들, 연대 방문했던 어린 학생들까지 수백 수천명이 기억할 거에요.
세 번째는 웃음입니다. 폐공장에서마저 쫓겨나고, 수년에 걸친 정리해고 소송에서도 끝내 부당한 판결을 받으며 앞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장기투쟁의 길에서조차 우리는 가장 권위 없어 보이는 존재 때문에 울고 웃을 수 있었지요. 노동운동의 뛰어난 웅변가도 아니고 늘 뒷전에서 서성이던 노동자 임재춘은 이전에 한번도 해보지 못했던 배역을 맡아 일약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박자를 못 맞추는 ‘까혼’ 연주자, 더듬더듬 '시 읽어주는 남자', 연극 <구일만 햄릿>의 배불뚝이 청순한 '오필리어' 등등 조용히 살고 싶었던 '시골 남자'에게 매번 넘어야 할 큰 산이었지만, 끙끙대면서 애쓰던 그는 경봉 형 말대로 '기승전 임재춘'이 되었습니다.
제조업 정규직 노동자로 일만 할 때 세상을 몰랐고,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는 임재춘은 투쟁 13년 동안 비로소 노동자의 주체로 서게 되었습니다. 비정규직 자식 세대들에게 노동이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어주고자 오랜 기간 투쟁한다고도 했어요. 아침 일찍 일어나 꼭 밥을 챙겨먹고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었지만, 마지막엔 자기 몸을 깎는 42일간의 단식 투쟁까지 감행해야했지요. 회사 쪽과 합의를 이끌어내고 대전 집으로 돌아가서는 보식도 제대로 못한 몸으로 일용직 노동 현장에 나가기 시작했어요. 학교 보수공사 일, 아파트 경비직, 구청 공공일자리 풀 뽑는 일 등등 육신을 움직일 수 있는 한, 자기 노동으로 돈을 벌어 그동안 딸들에게 못했던 아빠 노릇도 하고, 연대해주었던 친구들에게 보답을 하고 싶어했지요.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노동자로 살았던 임재춘이 남긴 또 다른 선물은 그가 썼던 농성일기, 거기서 모티프를 얻고 스토리를 짜서 만든 이란희 감독의 <천막>, <휴가>, 그리고 그가 ‘내 영화’라고 자랑하던 다큐멘터리 <재춘언니>, 그밖에도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탄생한 미술, 음악, 책, 연극, 영화 등이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투쟁하고 연대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몸소 실천했던 일이겠지요. 누구에게나 가장 친근한 사람, 벌써부터 그리운 고마운 재춘언니!
이수정/다큐 <재춘언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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