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불복, 좌표찍기, 지지층 선동... 브라질판 1·6사태 불렀다

뉴욕/정시행 특파원 2023. 1. 9.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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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양극화가 만든 브라질 대혼돈 사태
지난 8일 브라질의 대선 불복 시위대가 브라질리아 연방 의회에 사무 집기로 쌓으려 했던 바리케이드 모습. 이들은 약 4시간만에 대부분 진압됐으며 현재 400여명이 체포됐다./로이터 연합뉴스

지난 8일 오후 3시쯤 브라질 수도 브라질리아의 3부 기관이 밀집한 연방 관구에 브라질 상징색인 노랑·초록 티셔츠, 또는 위장 군복 차림에 복면을 쓰거나 브라질 국기를 어깨에 두른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 지지자 수천명이 집결했다.

AP·로이터 통신과 폴랴 지 상파울루 등 현지 매체들에 따르면, 이들은 쇠파이프와 야구방망이, 돌 등으로 먼저 연방 의사당의 유리창과 출입문을 마구잡이로 부수고 들어갔다. 사무 집기부터 국보급 예술품 등을 각종 둔기와 총기로 부수고, 바닥 카펫에 불을 질렀다. 소파·책상을 쌓아 의회 안팎에 바리케이드를 만들어 장기 점거를 준비했다. 또 의사당 지붕에 올라가 ‘(군부) 개입’이라고 적은 플래카드를 펼쳐 보였다. 일부 시위대는 사무실에서 각종 서류를 파손·탈취했다. 의사당 본회의장 의장석에 앉아 깔깔 웃고 미끄럼을 타기도 했다. 이들은 해산을 유도하는 경찰을 향해 의자와 소화기를 내던지고 최루가스 스프레이를 쏘며 저항했다. 기마 경찰을 말에서 떨어뜨려 폭행하기도 했다. 시위대 일부는 이렇게 브라질의 심장부를 유린하는 장면을 휴대폰으로 찍어 소셜미디어에 중계했다.

브라질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8일 3부 기관을 습격한 뒤, 이날 저녁 군경에 진압돼 줄줄이 체포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시위대는 이어서 인근 연방 대법원과 대통령궁도 습격했다. 대통령궁 관계자는 “대통령 집무실 의자가 불타고, 보안용 총기와 탄약, 기밀 서류도 일부 탈취당했다”고 밝혔다. 또 시위대는 현장 취재 중이던 내외신 기자 10여 명의 카메라를 빼앗아 부수고 폭행했다. 뉴욕타임스·가디언 등 각국 언론은 “2021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조 바이든 대통령의 당선 인증을 막기 위해 연방 의사당에 난입했던 초유의 사태가 세계 최대 민주주의 국가 중 하나인 브라질에서 2년 만에 재현됐다”고 전했다.

브라질 시위대는 지난해 10월 대선 결선투표에서 야당 후보 룰라가 1.8%포인트 차로 당선, 자신들이 지지하는 보우소나루 당시 대통령이 연임에 실패하자 두 달 넘게 거리에서 무력 시위를 벌여왔다. 상파울루·리우데자네이루 등 대도시로 연결되는 고속도로를 화물트럭으로 막고 타이어를 태우며 차량의 통행을 막았다. 주요 군부대 앞에는 일명 ‘애국캠프’라는 이름의 텐트촌을 차려놓고 노숙하며 쿠데타를 촉구해왔다. 룰라 대통령 취임식장 주변에 폭탄·총기 테러를 시도하기도 했다.

브라질 3부 기관이 아수라장 - 8일(현지 시각)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왼쪽) 브라질 대통령이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점거했던 수도 브라질리아의 대통령궁 내부를 둘러보며 피해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위 사진). 이날 브라질 보안군이 의회 앞에서 시위대를 향해 최루 가스를 발사하고 있다(가운데 사진). 흥분한 시위대가 대법원에 진입하기 위해 바리케이드로 창문을 깨고 있다(아래 사진). /AP·로이터·AFP 연합뉴스

브라질에서 1964년 군 쿠데타 이래 민주주의에 대한 무력 공격이 일어난 것은 60여 년 만이다. 브라질 군부는 지난 대선 직후 “대통령 선거 부정의 정황은 찾을 수 없으며 군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발표, 이번 사태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플라비우 지누 브라질 법무장관은 이날 시위 진압 후 “무력으로 뜻을 강요하려는 터무니없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로자 베버 대법원장은 “테러리스트들은 재판을 통해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브라질리아 연방 주지사는 사태 책임을 물어 치안 총책임자이자 보우소나루 정부 법무장관을 지낸 안데르송 토레스 안보장관을 즉각 해임했다.

브라질 대선 결선투표를 열흘 앞둔 지난해 10월 자이르 보우소나루 현 대통령이 상파울루에서 유세를 하고 있다. 그는 대선 패배시 승복하지 않을 것을 수차례 시사해왔다./AFP 연합뉴스

‘대선을 도둑맞았다’는 극렬 지지자들의 피해 망상과 분노를 키운 데는 보우소나루의 책임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포퓰리스트 성향 정책으로 ‘남미의 트럼프’로 불린 보우소나루는 대선 1년 전부터 여론조사에서 룰라에게 계속 뒤지자 현직 대통령이면서도 아무런 증거 없이 “전자투표기 오작동 가능성이 있다” “일부 선관위원이 개입해 결과를 바꾼다”고 주장, 대선 불복의 씨를 뿌려왔다. 인구 2억 브라질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100% 전자투표를 20년 가까이 실시해 온 나라로 부정선거 가능성이 작은 곳으로 꼽힌다.

보우소나루는 대선 직전엔 “나에게 이번 선거 결과는 세 가지뿐이다. 승리, 암살, 혹은 체포”라면서 자신에 대한 권력 남용·부패 혐의 수사 등 정치 보복을 피하려면 반드시 이겨야 하며, 패배는 인정하지 않겠다고 지지자들을 선동했다. 실제 그는 대선 이후 지금까지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은 채 의회와 대법원 등이 부정선거에 가담했다며 ‘좌표’를 찍기도 했다. 다만 이날 시위대의 3부 기관 습격에 보우소나루가 직접 관여했다는 정황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보우소나루는 지난해 연말 브라질을 떠나 현재는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에 머물고 있다. 8일 미 의회에선 그를 미국 땅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성토가 쏟아졌다.

대선 결과에 불복하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브라질 대통령의 한 지지자가 8일(현지시간) 브라질리아의 3부 기관 습격 당시 군경과 대치하던 중 동료 시위대를 보호하고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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