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우리만 옳고 너희는 틀리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조장이 아니라 조정[극단의 한국 정치]
장면 하나. 서울 이태원 녹사평역 인근에 마련된 이태원 핼러윈 참사 시민분향소는 ‘이재명 상습 거짓말쟁이 구속 수사하라’ 등 플래카드로 둘러싸여 있다. 분향을 하러 가는 길에도, 분향을 하고 돌아선 다음에도 플래카드가 보인다. ‘더 이상 슬픔을 강요하지 말라’는 유가족을 향한 날선 말의 한편에 ‘세월호 팔아 집권한 문재인·이재명 민주당’을 비롯한 정치적 주장도 눈에 띈다. 한때는 ‘윤석열 잘한다’는 현수막도 걸려 있었다.
장면 둘. 서울 중구 숭례문 인근 거리에 ‘윤석열 퇴진’ 손팻말이 수없이 펼쳐졌다. 시민단체 ‘촛불전환행동’(촛불행동)이 지난 7일 개최한 ‘촛불대행진’의 일환이다. ‘김건희 특검’이 적힌 손팻말도 곳곳에 자리했다. 행사 중간 참석자들은 윤석열 대통령의 얼굴이 그려진 풍선을 손에 쥐었다. 사회자가 “윤석열 지구를 떠나라”고 구호를 외치자 강하게 움켜쥐어 터뜨렸다.
지지 집단들의 비윤리·반인권적 발언에
정치인들, 저지는커녕 방관하거나 추동
국가권력의 비판자 역할 했던 시민사회
지금은 정치권력의 한편에 서서 ‘싸움질’
두 장면은 언뜻 무관해 보인다. 행위 주체는 보수·진보로 성향이 다르고, 행위의 대상 역시 참사 희생자와 국가 수반으로 차이가 난다. 그러나 유사점도 발견된다. 극렬 정치 지지자들이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발언을 한다. 지지세력의 잘못은 무조건 옹호하고, 반대세력의 잘못은 무조건 비난한다. 모든 사안을 정치화해 극단적인 이분법으로 환원시킨다. 더 큰 문제는 극렬 지지자들의 과격한 구호가 제도권 정치에 반영된다는 점이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의견을 토론과 숙의로 정제하는 제도권 정치의 기능이 약화됐다. 제도권 정치 역시 양극단으로 갈리면서 극렬 지지자들의 목소리를 부추기는 악순환 양상이 나타난다. 전문가들의 분석을 토대로 정치 지지자의 행태와 그 배경을 들여다봤다.
촛불, 민주주의의 모범 사례로 꼽히지만
권력 창출 혹은 방해 행위로 악용되기도
‘죽고 죽이는 게임’…촛불 이후의 ‘학습효과’
“시민사회를 존중하는 이유는 권력이나 자본으로부터의 자율성 때문인데, 지금은 권력의 사이클과 함께 움직이잖아요. 지켜보기 어렵습니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최근 시민운동의 경향을 양극화된 정치가 악화되는 한 배경으로 진단했다. 일부 시민단체의 극단적 주장이 정치적으로 비화하는 일이 잦아졌다. 과거 시민사회가 국가권력의 기본권 침해 내지 부당한 권력행사를 향한 비판자로서 역할을 했다면, 지금은 정치권력의 어느 한편에 서서 상대편과 싸우는 경향이 보인다는 것이다. 예전에도 특정 시민단체가 여야 어느 한편과 합세하는 일이 없진 않았으나 제한적이었다. 주장하는 바가 같을 때는 곁에 섰지만 충돌할 때는 돌아섰다. 정치학자들이 시민사회를 두고 ‘독립성’ ‘자율성’이란 말을 쓴 이유였다.
그가 생각하는 시민운동의 변곡점은 2016년 촛불집회다. 당시 촛불집회는 국회의 탄핵소추와 헌법재판소의 탄핵을 만들어내면서 민주주의의 모범 사례로 평가됐다. 반면 그늘도 남겼다는 것이 박 학교장의 진단이다.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의 탄핵, 문재인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이어진 경험이 시민운동에 부정적 영향을 줬다는 것이다. “권력을 창출하거나, 권력을 애먹이는 행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촛불을 주도하기 시작한 겁니다.”
촛불행동 등 일부 시민단체의 윤 대통령 ‘탄핵’ ‘퇴진’ 집회가 한 예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금 대통령을 상대로 탄핵 얘기부터 나오는 것은 비상식적”이라고 말했다. 박씨처럼 국정농단을 한 것도 아니고, 국가 안위를 위태롭게 하는 등 중대한 법률 위반도 지금 단계에선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여기에 동참했다. 지난해 10월 김용민 의원은 윤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집회에 참석해 “여러분들이 뽑은 대통령을 여러분들이 다시 물러나게도 할 수 있다. 그게 바로 진정한 국민주권 실현”이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11월엔 안민석·강민정·김용민·유정주·양이원영·황운하 민주당 의원 등이 윤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에 참석했다. 장경태 최고위원은 지난해 12월 같은 시위에 참여해 “우리 국민은 촛불을 통한 경험이 있다. 정부·여당이 결코 이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 같은 사례가 양극단화된 정치를 더욱 극단으로 몰고 가고 있다고 장 교수는 진단한다. “민주당과 지지자들은 보수 정부에서 일어난 참사로 정치적인 반사이익을 봤어요. 그 학습효과로 과격한 정치 메시지를 내는 거죠.”
SNS와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 행태도
극단의 과잉대표들에 ‘가속 페달’ 제공
지지자 방치·조장하는 정치권
이태원 참사 희생자 분향소의 풍경에서도 유사한 모습이 목격된다. 분향소 인근에 설치된 상당수 현수막은 시민단체 ‘신자유연대’ 명의다. 대표인 김상진씨가 운영하던 유튜브 채널의 이름은 ‘윤지사(‘윤석열을 지키는 사람들’의 약자)TV’로, 현 정부 지지세력이나 다름없다. 지난달 19일 시민분향소에 들어선 한 여성이 유가족을 향해 “시체팔이” 등 혐오 발언을 했다. 이 여성은 발언 후 분향소 옆 신자유연대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참사 희생자 박가영씨의 어머니는 여당 의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의원님들 지지하는 분들이 오셔서 우리 애들 영정에 대고 ‘개딸X들’이라고, ‘이XX 저XX’라고 욕한다”며 ‘2차 피해’를 호소했다.
정치권은 이들의 움직임에 침묵했다. 국민의힘이 ‘2차 피해가 심각하다’는 유족의 이야기를 직접 들은 것은 지난달 20일로, 참사 발생 53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2차 피해 방지를 촉구했지만, 두 달 가까이 온갖 혐오성 발언이 이어진 이후다.
일부 여당 관계자들은 오히려 지지자들의 이러한 행동에 편승하는 모습을 보였다. 때론 과격한 분위기도 조장했다. 국민의힘 소속 김미나 창원시의원은 지난 12일 “나라 구하다 죽었냐” “자식 팔아 장사한다” 등의 글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게재했다. 창원시의회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 중 김 의원에 대한 징계요구서에 서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국회에서는 “이태원은 세월호처럼 가면 안 된다”(권성동 의원), “참사 영업상”(김상훈 의원) 등 거친 말이 이어졌다.
2016년 촛불의 경험이 민주당에 부정적 영향을 줬다면, 국민의힘 등 보수 계열 정당에는 2008년 촛불은 ‘반면교사’다. 장 교수의 진단이다. “MB(전직 대통령 이명박씨)가 당시 두 번 사과했고, 내각도 다 바뀌었거든요. 트라우마 같아요. 그때처럼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죠.” 사회적 비극은 이들에게 곧장 ‘정치적 위기’로 해석된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불씨가 남으면 언젠가 큰 타격이 될 수 있다는 불안이 남는다. 여당과 대통령실이 정치적·법적 책임을 구분하는 데 집중하고, 야당은 ‘꼬리 자르기’라는 말로 비판하는 맥락이다.
“자제의 규칙을 정해주는 게 정치의 역할
인기 없는 말과 행동도 할 수 있어야”
선거제 개편, 해법 될까…인기 없는 말에 용기 내야
극단 주장을 하는 이들이 사회 전체 기준 다수라고 하긴 어렵다. 하지만 정치 무관여자가 많은 사회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실제 숫자 대비 부풀려진다. 국민의힘 소속 A의원은 “투표율 하락이 드러내듯 정치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점점 줄어드는 반면, 정치에 열중하는 이들은 강성이고 당원인 경우도 많다. 목소리가 크다 보니 정치인 입장에서 휘둘리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SNS의 발달과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 행태는 극단의 과잉대표에 ‘가속페달’을 제공한다. “정치인이 지지자 대상의 과격한 메시지를 SNS에 게재하면, 이걸 바로 언론이 받아 쓰잖아요. 그럼 그게 ‘진짜 뉴스’가 돼서 전파돼요.” 서울대에서 사회과학을 가르치는 B교수의 분석이다.
정작 ‘시민사회’라고 부를 영역은 점차 힘을 잃고 있다. 정치세력과 직접 연계되거나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는 단체가 늘면서 전통적 시민단체들이 상대적 열세가 됐다. 참여연대 등 오래된 단체가 문재인 정부 시기 ‘조국 사태’ 등 일부 이슈와 관련해 비판을 조심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데 대해 ‘똑같이 정치적’이란 냉소도 늘었다.
정부·여당이 최근 시민단체 국고보조금 부정 수급 의혹에 열을 올린 것은 전 정부에 ‘네 편’ 단체가 있다는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반대로 민주당을 비판하는 시민단체의 목소리는 마치 중립적인 것처럼 추켜세운다. 민주당은 반대다. 거울상 관계인 양측의 주고받기 속에 비판은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칭송받거나 배격되고, 후일 보복당할 위험으로 남는다. B교수는 “피감기관인 국립대에 있다 보니 요즘 분위기에서 말하기가 조심스럽다”며 실명 인터뷰를 거절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 2일 한 언론 인터뷰에서 “소선거구제는 전부 아니면 전무로 가다 보니 선거가 너무 치열해지고 진영이 양극화되고 갈등이 깊어졌다”며 선거제 개편을 시사했다. 다당제가 중도층 내지 정치 무관심층의 참여를 유도하고, 제3정당은 캐스팅보터로 진영 갈등을 완화한다는 오래된 주장의 부활이다.
이론적으론 선순환이지만, 한국에서 달성된 적 없는 기대다. 20대 국회에서 국민의당·바른정당은 각 30여석으로 캐스팅보터 역할이 가능했지만 곧 바른미래당으로 합쳤다. 종국엔 양당에 흡수되는 길을 걸었다. 선거제 개편 논의도 역사상 여러 차례 등장했지만 실제 개편으로 연결된 적은 거의 없다. 실제 이뤄진 사례는 위성정당 창당으로 이어졌고, 양당제를 공고화했다. 전문가들은 선거제 개편 이전에 정치권의 책임을 주문한다. 박 학교장은 “돈쓰기 싫은 사람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욕하기 쉬운 사람에게 자제의 규칙을 정해주는 게 정치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한 명 한 명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이 지지자의 극단 목소리에 경고음을 내야 극단에 대한 비판이 사회적으로 활성화된다는 의미다.
정치 지도자로서 윤 대통령의 역할도 재고할 점이 있다. 장 교수는 민주노총 화물연대의 파업을 예로 들며 정부의 강경대응에 아쉬움을 표했다. 파업에 대한 시민의 불편한 감정을 건드려 정부·여당을 향한 지지율 상승은 견인했지만,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선 경제사회적 원인은 해결한 바 없어 후일 갈등할 요소를 남겼다는 것이다. “기존 방식대로 갈등할 게 아니라, 합리적 대안을 보여줬어야죠.”
B교수는 언론을 향해 “독자들이 많이 볼 것으로 예상되지만, 합리적이지 않은 의견은 싣지 않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전문가들의 공통된 주문은 “인기 없는 말·행동을 할 용기”였다.
< 시리즈 끝 >
조문희 기자 moon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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