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절망보다 힘이 세다

이제훈 2023. 1. 9.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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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훈의 1991~2021][이제훈의 1991~2021] _45

그러나 또한 우리는 안다. 절망과 좌절은, 식민과 전쟁과 분단과 냉전의 잔혹한 세월을 뚫고 황무지에 ‘평화번영’의 꽃을 피우려 애써온 한반도 남과 북 8000만 시민·인민의 선택지가 될 수 없음을. 2018년 9월 정상회담 때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평양 능라도 5·1경기장과 백두산 천지에 새겨놓은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이라는 한반도 미래상을 포기할 수 없음을. 적대의 과거에 사로잡힌 오늘이 아닌 평화번영의 미래를 앞당기는 오늘을, 절망을 이기는 희망으로 성실하게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2018년 9월19일 밤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이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 김정은이 지켜보는 가운데 10만 평양 시민을 상대로 ‘7분 연설’을 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백두에서 한라까지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영구히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주자”고 호소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2018년 8월31일 청와대 대변인은 “문재인 대통령은 9월5일 특별사절단을 평양에 보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정의용 특사단장은 방북 하루 전인 9월4일 기자회견에서 “남북관계 발전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 협상 과정을 견인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9월14일 남과 북은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개소식을 강행했다. 미국의 거센 물밑 반대를 뿌리치고.

그렇게 2018년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문 대통령은 9월18일 오전 8시55분 서울공항에서 공군1호기에 올라 서해 직항로를 따라 9시50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김정은·리설주 부부는 공항부터 백화원영빈관까지 문재인·김정숙 부부와 함께 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문 대통령을 숙소인 백화원영빈관으로 안내하며 “발전된 나라에 비해 우리 초라하죠. 수준은 좀 낮을 수 있어도 성의를 다해 한 숙소이고 일정이니 우리 마음을 받아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9월18일 오후 3시45분 평양 조선노동당 중앙위 본부청사에서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세 번째 정상회담 1차 회담이 시작됐다. 회담에 앞서 김 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역사적인 조미대화 상봉의 불씨를 문 대통령께서 찾아줬습니다. 조미 상봉의 역사적 만남은 문 대통령의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로 인해 주변지역 정세가 안정되고, 더 진전된 결과가 예상됩니다. 문 대통령께서 기울인 노력에 다시 한번 사의를 표합니다.” 2018년 6월12일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의 물꼬를 튼 문 대통령이 2019년 2월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더 진전된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계속 도와달라는 감사 겸 당부다. 실제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노동당 청사 1차 회담에서 나눈 대화의 80~90%가 핵 관련이었다”는 게 남쪽 고위 인사의 전언이다.

사정은 이렇다. 한반도를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9월 평양공동선언’ 5조)으로 만들자면 4대 핵심 과제(북미관계 정상화, 비핵화, 평화체제, 남북관계 개선·발전)를 이뤄야 한다. 달리 말하면 ‘한반도 냉전구조’의 4대 기둥(남북 불신·적대, 북미 적대, 핵 등 대량파괴무기(WMD)를 포함한 군비경쟁, 군사정전체제)을 해체해야 한다. 그런데 한반도 냉전구조의 4대 기둥은 상호의존적인데다 서로 얽혀 있어 포괄적·단계적 접근이 불가피하다. 무엇보다 “북한 핵문제는 미·북 적대관계의 산물이라 미·북 관계가 정상화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임동원)다. 요컨대 ‘북핵 폐기와 북미 관계 정상화(의 교환)’가 한반도 평화의 열쇠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핵 관련 논의에 집중한 까닭이다.

‘9월 평양공동선언’의 5조에 담긴 “북측은 미국이 6·12 북미 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상응조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용의를 표명했다”는 김 위원장의 비핵화 조처 약속은 9월18일 저녁 평양 목란관에서 진행된 환영만찬 와중에 사실상 최종 확정됐다. 김 위원장이 자신의 ‘결심’을 서훈 국가정보원장한테 구술했고, 서훈 원장은 이를 문 대통령한테 보고해 두 정상의 합의를 최종 확인했다고 당시 사정에 밝은 고위 인사가 전했다.

9월19일 오전 10시5분부터 11시10분까지 백화원영빈관에서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2차 회담이 진행됐다. 1시간 남짓한 회담의 “70~80%를 김 위원장이 핵과 관련해 자신의 의견을 밝히거나 문 대통령한테 묻는 데 썼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평양 회담에서 핵 문제만 논의한 건 아니다. “비무장지대를 비롯한 대치지역에서의 군사적 적대관계 종식을 한반도 전 지역에서의 실질적인 전쟁위험 제거와 근본적인 적대관계 해소로 이어나가기로 했다”(‘9월 평양공동선언’ 1조)며, ‘(4·27)판문점선언 군사분야 이행합의서’(9·19 군사분야 합의서)를 평양 정상회담 부속합의서로 채택했다. 9·19군사분야 합의에는 △서해 평화수역화 △비무장지대 평화지대화 △군사분계선(MDL) 일대 군사연습 중지 등 5개 분야 20개 항목에 걸친 약속이 담겼다. 특히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남북 양쪽으로 지상(각 5㎞씩), 해상(각 40㎞씩), 공중(최대 각 25㎞씩)의 적대행위 중지 구역을 설정한 사실이 중요하다. 전후 70년 분단사에 가장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군사적 신뢰구축 약속이다. 협상에 참여한 최종건 청와대 평화군비통제비서관은 9월19일 평양 기자회견에서 “남북관계의 제도화가 군사영역까지 확대된 사실상의 불가침 합의서”라고 자평했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초보 단계의 운용적 군비 통제 개시”라고 평가했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9월19일 오전 11시24분 백화원영빈관에서 ‘9월 평양공동선언’에 서명하고, 송영무 국방장관과 노광철 인민무력부장의 9·19군사분야 합의서 서명식에 임석했다.

이어 오전 11시40분부터 10분간 ‘9월 평양공동선언’을 공동으로 발표했다. 김 위원장은 결연한 낯빛으로 이렇게 외쳤다. “선언은 길지 않아도 여기에는 새로운 희망으로 높뛰는 민족의 숨결이 있고, 강렬한 통일의지로 불타는 겨레의 넋이 있으며 머지않아 현실로 펼쳐질 우리 모두의 꿈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앞길에는 탄탄대로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역풍도 두렵지 않습니다. 평화와 번영으로 가는 성스러운 여정에 언제나 지금처럼 두 손을 굳게 잡고 앞장에 서서 함께해 나갈 것입니다.”

문 대통령은 감회 어린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전쟁 없는 한반도가 시작되었습니다. 한반도를 항구적 평화지대로 만들어감으로써 우리는 이제 우리의 삶을 정상으로 돌려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전쟁의 위협과 이념의 대결이 만들어온 특권과 부패, 반인권으로부터 벗어나 우리 사회를 온전히 국민의 나라로 복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평화와 번영을 바라는 우리 겨레의 마음은 단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남북관계는 흔들림 없이 이어져갈 것입니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다음날 홀가분한 마음으로 ‘민족의 성산’ 백두산에 올라 천지를 배경으로 두 손을 맞잡고 환한 표정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안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어떻게 망가져 갔는지.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어떻게 다시 ‘적대관계’로 돌변했는지.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의 마지막 안전핀인 9·19군사합의가 어떻게 폐기의 벼랑 끝으로 내몰렸는지.

그러나 또한 우리는 안다. 절망과 좌절은, 식민과 전쟁과 분단과 냉전의 잔혹한 세월을 뚫고 황무지에 ‘평화번영’의 꽃을 피우려 애써온 한반도 남과 북 8000만 시민·인민의 선택지가 될 수 없음을. 2018년 9월 정상회담 때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평양 능라도 5·1경기장과 백두산 천지에 새겨놓은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이라는 한반도 미래상을 포기할 수 없음을. 적대의 과거에 사로잡힌 오늘이 아닌 평화번영의 미래를 앞당기는 오늘을, 절망을 이기는 희망으로 성실하게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한반도가 전쟁의 위기에 휩싸여 두려움이 싹틀 때, 한반도의 남과 북에서 벌어지는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과 사건으로 ‘적개심’이 스멀스멀 자랄 때, 2018년 9월19일 밤 대한민국 대통령이 평양 5·1경기장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10만 평양 시민을 상대로 한 ‘7분 연설’이 담긴 동영상을 다시 보자. 문 대통령이 “오늘 김정은 위원장과 나는 한반도에서 전쟁의 공포와 무력충돌의 위험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조치들을 구체적으로 합의했습니다. 또한 백두에서 한라까지 아름다운 우리강산을 영구히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주자고 확약했습니다”라고 선언했을 때, 경기장을 휘감은 짧은 고요와 그에 뒤이은 평양 시민들의 열렬한 박수와 환호성을 기억하자. 그리고 또한 문재인의 입을 빌려 한반도 남과 북 8000만 시민·인민의 ‘꿈’을 지구촌에 선포한 이 외침을 잊지 말자.

“평양시민 여러분, 동포 여러분, 우리 민족은 우수합니다. 우리 민족은 강인합니다. 우리 민족은 평화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함께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5천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습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지난 70년 적대를 완전히 청산하고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평화의 큰 걸음을 내딛자고 제안합니다. 우리 함께 새로운 미래로 나아갑시다.”

희망은 절망보다 힘이 세다.<끝>

※연재를 읽어주신 분들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애쓰시는 모든 분들께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전합니다.



이제훈 |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1993년 한겨레에 들어와 1998년부터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사업의 시작과 중단, 다섯차례의 남북정상회담, 여섯차례의 북한 핵실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3세 승계’, 두차례 북·미 정상회담, 사상 첫 남·북·미 정상회동 등을 현장에서 취재·보도해왔다. 반전·반핵·평화의 한반도와 남북 8천만 시민·인민의 평화로운 일상을 꿈꾼다.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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