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병존적 채무인수’는 어설픈 법률론에 역사적 퇴행

한겨레 2023. 1. 9.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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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동원]

사단법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지난 12월26일 오후 광주광역시의회 시민소통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가 추진하는 피해 보상 방안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제공

[왜냐면] 김창록 |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023년 첫날 새벽, 일본의 <산케이신문> 인터넷판이 묘한 기사를 올렸다. 기사에 따르면, 한국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이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에게 이르면 이달 중 강제동원 배상 문제와 관련한한국쪽 해결책을 발표하겠다는 의향을 전달했다고 한다. 해결책으로는 한국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패소한 일본 기업의 배상금에 상당하는 기부금을 한국 기업 등으로부터 모아 원고에게 지급하는 방안이 유력하다고 전했다. 또 <산케이신문>은 “일본 쪽은 ‘한국의 국내 문제’라는 입장이기 때문에 해결책 발표는 한국 쪽이 단독으로 하는 방향으로 조정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요컨대 ‘대법원 강제동원 판결이 일본 기업에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고 선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정부가 그 책임을 전적으로 대신 떠맡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라는 의미다.

외교부 관계자는 “정해진 것이 없다”라는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지만, 사태의 흐름은 그 방향으로 빠르게 진행될 가능성을 가득 품고 있는 듯 보인다. 만일 윤석열 정부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국내 언론의 관련 보도에는 ‘대위변제’, ‘병존적 채무인수’ 등 법률가에게도 친숙하지 않은 용어가 어지럽게 난무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일본 기업의 책임을 한국 쪽이 대신 떠안는다’는 잘못된 방향을 덮어 가리려는 잔기술에 불과하다. 게다가 <산케이신문>의 기사처럼 애당초 책임이 없다는 일본 쪽 주장에 굴복해 한국 쪽이 단독으로 책임을 지겠다고 한다면 어설픈 법률론에 처참한 외교참사가 더해지는 꼴이 될 것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20년 가까운 긴 세월 동안 한국에서 일본의 거대기업을 상대로 어렵게 소송을 진행한 끝에 대법원으로부터 승소 판결을 얻어냈다. 마침내 가해자로부터 손해를 배상받을 법적인 권리를 확인받은 것이다. 그런데 가해자인 일본 기업은 그 오랫동안 한국 최대의 법률회사를 동원해 한국의 법정에서 고령의 피해자와 다투어놓고는 막상 판결이 선고되자 못 따르겠다고 한다. 한국에서 이윤을 챙기면서 한국의 법은 따르지 못하겠다고 억지를 부린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다시 법원에 압류명령, 매각명령을 구하는 절차를 이어가고 있다. 다름 아니라 가해자로부터 손해를 배상받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가 나서서 가해자의 책임을 지우겠다고 하는 꼴이다. 대법원의 판결에 따르면 아무런 책임도 없는 한국 기업에 돈을 받아 전달하겠다고 한다. 안 받으면 공탁을 해서라도 끝내겠다고 한다. 피해국이 가해자의 책임을 지워주기 위해 이토록 애를 쓰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이 자국민인 피해자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라도 갖춘 태도인가?

일본 기업의 책임을 한국 쪽이 대신 지겠다고 하는 것은 그 책임을 선언한 대법원 판결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행정부가 개입하고 있으니 행정권에 의한 사법권의 부정으로서 삼권분립을 규정한 헌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나아가 대법원 강제동원 판결이 일제의 한반도 지배가 불법강점이라는 판단의 근거를 헌법 전문의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에서 찾고 있으니, 그 판결을 부정하는 것은 곧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동시에 그것은 심각한 역사의 퇴행이기도 하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박정희 정부가 일본 정부와 체결한 1965년 한일 기본조약 제2조는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라고 규정했다. ‘이미’라는 타협적 수식어 때문에 일본 쪽에 일제의 한반도 지배가 ‘합법’이었다고 주장할 빌미를 주기도 했지만,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병합늑약 등이 당초부터 무효라는 대한민국의 공식입장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합법 지배’라는 자신의 전제에서 출발해 강제동원이라는 것을 애당초 인정할 수 없고 따라서 대법원 판결은 잘못된 것이라고 공격하고 있다. 그런 일본 정부의 공격에 전면 굴복하는 것은 1965년 수준 이하로 전락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 결과는 박정희 정부보다도 몰역사적인 최악의 정부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

외교참사, 피해자 경시, 사법권 부정, 헌법 부정, 역사 퇴행. 윤석열 정부가 이 잘못된 최악의 길로 나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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