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T현장] 이태원 청문회, 상식대로만 하라
1323년 고려 충숙왕 10년 1월 17일, 제주 사람이 익명으로 제주만호에 복직한 임숙을 비방하는 벽서를 붙였다. 벽서에는 "임숙은 매우 탐욕스럽고 간사해 온갖 방법으로 백성을 침탈해 고통을 감당할 수가 없다. 임지에서 복직시켰으니 우리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행성의 문에 방도 붙였다. 방에는 "좌우사낭중 오적이 임숙의 뇌물을 받고서 법대로 하지 않고 방면했다. 만약 성부에서 조사해 탄핵하지 않으면, 우리들 1000명은 마땅히 상성에 고발할 것"이라고 썼다. 결국 임숙은 파직을 당했다.
신분제 사회인 고려에서 백성의 익명서로 지방관을 교체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그럼에도 당시 교체를 단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임숙의 부정부패가 제주도민에게 큰 피해를 줬고, 이에 따라 민심의 불만도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결국 위정자들이 상식적인 조치를 한 셈이다.
부패 관리로 낙인이 찍힌 인물은 사회적으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기도 했다. 고려의 명문장가로 알려진 이규보가 쓴 시문집 '동국이상국집'에는 이 같은 상황을 전하고 있다. 문집에 따르면, 고려 고종 때 원외랑으로 재직한 최홍렬은 술자리에서 자기로 된 술잔으로 청렴하지 못한 관리의 이마를 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자 한 관리가 창피함을 느끼고 모임에서 몰래 빠져나갔다.
하지만 현대시대 공직자에게 적용되는 상식은 고려시대와 다른 것 같다. 뇌물 혐의가 있는 국회의원이 부끄러워하기는 커녕 법망을 피해간다. 국회는 지난달 28일 뇌물 6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찬성 101표, 반대 161표로 부결시켰다. 노 의원 수사가 현 정권의 야당에 대한 표적 수사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패 범죄 혐의가 있는 국회의원의 불체포를 이해할 국민은 많지 않다. 노 의원 이전에 정정순(민주당)·이상직(무소속)·정찬민(국민의힘) 의원에 대해 제출된 체포동의안 3건 모두가 가결된 것도 과거와 달라진 국민의 눈높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청렴하지 못한 관리를 향하던 백성들의 따가운 시선과 전혀 다르지 않다. 노 의원이 떳떳하다면, 영장실질심사에 나가 법원의 판단을 구하는 일까지 마다해선 안 된다는 게 국민의 상식적 판단일 것이다.
이 뿐만 아니다. 이태원 참사에 책임을 져야 하는 주무 부처와 관계기관 장들도 무책임하고 무성의한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거듭된 사퇴 압박에 거부 의사를 밝힌 재난안전 주무부처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계속 '말실수'를 했다. 특히 이 장관은 지난 12월 27일에 있었던 국조특위 1차 기관보고에서는 참사 당시 사고를 안 지 85분이 지나서야 현장에 도착했다는 지적에 대해 "이미 골든타임이 지났었다" "그 사이에 놀고 있었겠냐" 등의 답변을 해 구설에 올랐다.
심지어 이태원 참사 당일 음주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술 마실 권리'를 주장했던 경우도 있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지난 4일 국회에서 열린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1차 청문회에서 "참사 당일 음주를 했느냐"는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자신의 음주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주말 저녁이면 저도 음주할 수 있다. 그런 것까지 밝혀드려야 하나"라고 했다. 음주 후 잠을 자는 바람에 오후 11시 32분과 11시 52분 경찰청 상황담당관의 참사 발생 보고를 놓쳤는데도 잘못이 없다는 식이다.
당연히 유족들은 분노할 수 밖에 없다. 고려시대 제주만호 임숙의 부정부패로 피해를 입은 제주도민보다 더 괴로운 심정일 수 있다. 참사로 가족까지 잃었는데 가슴에 담긴 분노가 오죽할까. 발언이 직설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나 유족들은 자신이 할 말을 다 하진 못한다고 한다. '정쟁 프레임'에 휩쓸려 일말의 진상규명 기회조차 날려버릴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여야는 앞으로 열릴 3차 청문회에 유가족들을 증인으로 채택하기로 했다. 청문회는 오는 12일 열릴 예정이다. 이날 청문회에는 유가족과 생존자들, 이태원 상가 상인들을 증인으로 부를 예정이다. '만시지탄'이지만 다행이다. 3차 청문회가 진상 규명의 큰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더 이상 유족들을 투사로 만들지 말라.
김세희기자 saehee012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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