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의 시네마 에세이 <75> 연을 쫓는 아이 ] ‘젠다기 미그자라’…연은 끊어져도 삶은 이어진다

김규나 2023. 1. 9.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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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연을 쫓는 아이’ 장면들. 사진 IMDB

새해, 사람들은 연을 날린다. 팽팽하게 실을 감고 풀면 마음이 설렌다. 줄을 매단 연은 얼마나 멀리 날아갈 수 있을까. 얼마나 높이 날아오를 수 있을까. 줄을 당겨 감으면 연은 무난히 착지한다. 줄과 줄이 엉켜 꼬이기도 한다. 곤두박질치며 추락할 때도 있다. 그런데 줄이 끊어져 멀리 사라진 연은 어디로 가서 어떻게 될까?

전쟁을 피해 미국에 정착한 뒤 소설가의 꿈을 이룬 아미르는 뜻밖의 전화를 받는다.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오랜 친구이자 어린 시절, 글쓰기를 칭찬해주던 칸 아저씨였다. 카불을 떠나 파키스탄에 머물고 있는 그는 자신을 만나러 와달라고 말한다. 일촉즉발의 화약고가 되어버린 중동 지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칸의 한마디가 총알처럼 날아와 박힌다. “아미르, 과거를 속죄할 기회가 있다.”

작든 크든 누구에게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이 있다. 기쁘고 자랑스러운 순간이 인생의 나침반이 되기도 하지만, 아프거나 부끄러운 시간을 가슴 깊이 묻고 살아가는 일도 드물지 않다. 되돌릴 수 없어서 기억을 왜곡하거나 지우고 살아가기도 한다. 묻어도 덮어도 자꾸 되살아나는 과거를 보상하기 위해 살아가는 인생도 있다.

아미르에게도 지켜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후회만 하며 살 수도 없었다. 중요한 건 지금 여기가 아닌가. 의도했든 안 했든 줄이 끊어져 멀리 날아가 버린 연을 왜 애써 찾아야 한단 말인가. 핫산이라면, 반드시 뛰어가 찾아냈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끊어진 연이 어떻게 날아가 어디에 떨어질지 기가 막히게 알아 먼저 가서 기다리는 아이였으니까.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기 전까지 아미르는 카불의 큰 저택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깨어있는 지성인이자 유능한 사업가였고 집안일은 하인 알리와 그의 아들 핫산이 맡아주었다. 모든 게 풍족했지만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늘 바빴다. 내성적이고 예민한 아미르의 가장 좋은 친구는 한 살 어린 핫산이었다.

주인집 아들과 하인 아들의 우정은 위태로웠다. 엄격하게 뿌리내린 아프가니스탄의 종족 차별 문화도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아미르는 주류 민족 파시툰족이었고 핫산은 소수민족 하자라족이었다. 파시툰족을 자부하는 소년 아세프는 핫산을 멸시했고 그와 형제처럼 어울리는 아미르도 모욕했다. 그때마다 핫산은 새총을 겨누어 아미르를 지켰다. 아버지는 그런 핫산을 대견하다며 귀여워했다. 의젓하고 용감한 핫산을 더 사랑하는 게 아닐까, 아미르는 불안했다.

새해 연날리기 대회가 있던 날, 아미르의 연은 핫산의 도움을 받아 가장 높이 날아올랐고 다른 아이들의 연을 모두 끊어내며 최종 우승자가 되었다. 아버지가 칸 아저씨를 얼싸안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아미르는 가슴이 벅찼다. 핫산도 훌륭한 전리품이 될 연을 찾으러 뛰어가며 신이 나서 외쳤다. “도련님을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

왜 삶은 항상 최고의 지점에서 추락시키는 것일까? 핫산은 아세프를 만나 잔혹한 폭행을 당한다. 오지 않는 핫산을 찾으러 갔다가 현장을 목격했지만 아미르는 두려워서 외면한다. 핫산이 지켜낸 연은 트로피처럼 벽에 걸렸고 아버지는 아미르를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핫산의 아픔과 아미르의 비겁함의 상징일 뿐이었다.

약점을 들켰거나 너무 큰 은혜를 베푼 사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졌거나 못난 자기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은 곁에 두고 싶지 않은 법이다. 죄책감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졌지만 열두 살 소년은 어떻게 잘못을 털어내고 관계를 회복해야 할지 몰랐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가벼워지지 않을까? 아미르는 도둑 누명을 씌워 알리와 핫산을 쫓아낸다.

파키스탄에서 재회한 칸은 핫산의 소식을 전한다. 소련이 떠난 뒤 아프가니스탄을 차지한 탈레반은 종족 학살을 저질렀고 핫산도 총살당했다. 칸의 부탁으로 아미르와 아버지가 떠나고 없는 빈집을 지키던 중이었다.

핫산이 남긴 편지에는 죽음이 코앞에 있는 줄 모른 채 아미르를 다시 만나길 기대하는 변함없는 충직함과 진실한 우정이 담겨 있었다. 어릴 적 핫산을 꼭 닮은 아들 소라브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함께.

부모를 모두 잃은 소라브는 카불의 고아원에 있었다. 칸은 아미르가 핫산에게 저지른 일을 모두 알고 있다며 그때는 하지 못한 일을 지금 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무엇보다 소라브가 하인의 자식이나 친구의 아들이라는 관계보다 훨씬 더 굵고 질긴 인연의 줄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널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 더!’ 

마음의 빚도 세월 따라 이자가 붙을까? 아프가니스탄은 죽음의 땅이었다. 불타고 무너진 건물들, 목 매달린 시체들, 굶주린 사람들과 부르카로 전신을 가린 여자들, 팔다리가 잘린 아이들. 탈레반의 눈 밖에 난 사람들에 대한 즉결 처형도 어디서나 벌어졌다. 조국을 떠나 미국인이 된 아미르를 탈레반이 곱게 보아줄 리 없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미르는 이번만큼은 두려움 뒤에 숨지 않기로 한다. 오래 전 줄이 끊어져 날아가 버린 연이 어디에 있는지 비로소 알게 된 거였다. 아미르가 핫산을 향해 ‘널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 더!’라고 외치며 작고 소중한 연을 찾으러 뛰어갈 차례였다.

소설 속 아미르와 많은 공통점이 있는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소설가 할레이드 호세이니의 동명 소설을 마크 포스터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2007년에 발표했다. 아프가니스탄 태생의 두 아역 배우의 연기가 잔잔한 파문을 그려낸다.

원작 소설에 ‘젠다기 미그자라’라는 말이 나온다. 아프간 말로 ‘인생은 계속된다’는 뜻이다. 

사람은 저마다 인연의 줄이 감긴 얼레를 갖고 태어난다.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희망의 연을 띄우고, 얽히고설킨 줄을 감고 풀며, 잘리고 끊어낸 줄을 또 다른 줄과 잇고 연을 묶듯 삶을 이어 간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멀어졌다 가까워지고,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인생은 한발 더 앞으로, 한발 더 높이, 한발 더 멀리 나아간다. 

죽은 것 같던 씨앗은 꽃으로 피고, 이별은 사랑으로 돌아오고, 실패와 절망 또한 성공과 기쁨으로 결실을 맺는 새해가 되기를. 젠다기 미그자라.


▒ 김규나
조선일보·부산일보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설 ‘트러스트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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