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파워 인터뷰 | 글로벌 베스트셀러 ‘파친코’ 작가 이민진] “청년들 게을러?…생존보다 행복 추구 더 어려워”
이민진이 왔다. 목 뒤로 수수하게 찰랑이는 다갈색 머리, 희고 반듯한 이마, 온유한 눈빛… 화선지에 담채로 그린 듯, 맑고 수려한 여성이 저벅저벅 걸어와 포옹했다. 키가 커서 깜짝 놀랐다. 유랑하던 소설 속 코리안들처럼, 그가 품은 겹겹의 너른 영토가 가슴에 깊숙이 압착됐다. Min jin Lee. 30년간 써 내려간 재일조선인 4세대의 가족 서사 ‘파친코’로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아프고 찬란한 실체를 세상에 알린 여자. 그 ‘디아스포라 3부작’의 출발점인 첫 소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 출간을 위해, 이민진은 짧은 내한 일정을 소화 중이었다. 잘 재단된 스트라이프 재킷, 청바지에 부츠 힐을 신은 그의 자태는 더할 나위 없이 쿨해 보였다. “요즘엔 무대에 설 때마다 자꾸 눈물이 난다. 그동안 한국인을 짝사랑해왔는데, 이제 러브레터의 답장을 받는 느낌이 든다.” ‘성공한 코리안 아메리칸’이라는 타이틀로는 설명이 불충분했지만, 이민자가 아닌 작가 이민진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자기 객관화와 자기 비하의 레이어(layer)를 인내심 있게 통과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초연함! 경계인의 서사로 주목받는 세계적인 작가, 이민진을 만났다.
최근에 일제강점기 시대를 다룬 세개의 소설을 읽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김훈의 ‘하얼빈’과 김주혜의 ‘작은 땅의 야수들’ 그리고 이민진의 ‘파친코’. 세 작품의 등장인물은 다 아름답고 기품이 있었지만, ‘파친코’의 무대는 정말 드넓었다. 이런 위대한 서사의 주인이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인가.
“내가 엄청난 대서사시를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대서사시 같은 역사가 나를 소유하고 있다고 느낀다. 나는 역사와 문화의 산물이다. 그래서 나는 책이 한 세대의 이야기만 담도록 쓰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한편으론 관심사가 코리아 디아스포라로 특정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이 주제만큼 강하고 오래 내 흥미를 끄는 것은 없다. 열아홉 살, 대학생 시절 처음으로 재일한국인의 역사에 관심을 가졌다. 그때부터 자이니치(재일동포)의 이야기에 끌림을 느꼈고, 끈질기게 연구하고 조사해 갔다. 내 인생을 소비할 만한 이런 주제를 발견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무엇보다 당신 소설의 첫 문장은 힘이 있다. ‘역사가 우리를 망쳤지만, 상관없다(파친코).’ ‘능력은 저주일 수 있다(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 강렬한 첫 문장의 탄생 비밀을 알려줄 수 있나.
“내 소설들의 모든 첫 문장은 책 전체를 드러내는 ‘주제문’이다. 초고 단계에서 마음에 드는 첫 문장을 쓴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나는 그 첫 문장을 발견하기 위해서 몇 번씩 책을 다시 쓴다. 전통적인 집필 방법은 아니다. 나는 기자처럼 기록하고, 학자처럼 논문을 쓰는 작업 형식을 취한다. 몇 번의 퇴고를 거치면서 조금씩 첫 문장이 두각을 드러낸다. 수많은 시간을 고군분투한 후에야,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해지고 내가 가진 질문에 대한 답이 떠오른다. 그 과정에서 처음 쓴 글이 쓰레기가 되기도 한다(웃음).”
애초부터 영감이 이끄는 매혹의 고지는 없었다. 모든 길을 다 밟아보고, 모든 목소리를 들어본 후 나온 ‘견고한 한 줄’은 광야의 북소리처럼 심장을 두드린다.
완벽주의자인가.
“(미소 지으며)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다. 바보스럽다. 긴장과 우울 증세도 있고 고집불통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감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50개의 각주를 모은다. 나를 설득하려면 51개의 각주를 들고 와야 한다. 나는 다작하지 않는다. 많은 작품을 내는 건 중요하지 않다. 나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권력과 돈은 필요 없다고 포기했다. 자연스럽게 좋은 결과가 따라오는 게 놀랍다. 하지만 나는 쉰네살이다(웃음). 그걸 기억해달라.”
글이 풀리지 않을 땐 조지 엘리엇의 ‘미들 마치’를 계속 읽는다고 했다. 수십 번, 수백 번이라도. 좋은 책은 공들여 읽고 또 읽어야 한다고. 청년들이 시험 때문에 고전의 요약본을 읽는 걸 안타까워했다. “독서는 거래가 아니다. 의도가 순수할 때 나를 변화시킨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나.
“보름달이 뜰 때만 쓴다(웃음). 농담이다. 나는 이야기의 아우트라인(대략 줄거리)을 잡지만 끊임없이 그것을 바꾼다. 일단 초안을 작성한 후 원고 전체를 다시 또다시 계속 수정해 간다. 나는 이 방식을 야심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나를 ‘거북이’라고 부르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지독할 정도의 체험 취재를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저널리스트 방식의 취재, 변호사의 조사 기법 등이 캐릭터 빌딩에 어떤 식으로 도움을 주나.
“세 가지 일을 모두 해봤기 때문에 기자처럼 인터뷰하고, 변호사처럼 양쪽의 입장에서 논쟁하고, 학자처럼 기록과 수치를 대조하며 가설을 검증한다. 모든 과정에 더 긴 시간이 소요되지만, 내가 쓰고 믿는 것을 통해 스스로 점점 강해지는 것을 느낀다.”
매일 성경을 한 챕터 읽고 글을 쓰는 이유는.
“변호사를 그만두고 나서 미국 작가 윌라 캐더가 매일 성경 한 챕터를 읽는다는 걸 떠올리고 그걸 작업 습관으로 시작했다. 나는 서양의 클래식한 문학에 심취해 있고, 성경을 잘 아는 것이 서양의 문학과 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덕분에 성경을 7번 읽었다(웃음).”
덕분에 당신은 모든 사람을 결함과 아름다움과 재능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는 것 같다. 당신이 쓴 이야기는 얼마나 자전적인가.
“나는 ‘파친코’의 선자가 아니다. 나는 케이시가 아니다.”
선을 긋는 얼굴조차, 선하고 온유했다. 웃음의 샘이 고인 듯한 그의 너른 이마와 초승달 눈썹이 조명을 받아 더욱 은은했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의 케이시는 북미 지역에서 성장한 똑똑한 여성이다. 부모님이 지지하지 않는 길을 선택해서 간다. 케이시가 나와 닮은 점은 키가 크고 발이 크다는 것 정도?”
이민진은 백만장자 이야기 속의 한씨 일가와 ‘파친코’의 선자 일가가 지닌 힘을 이야기했다. 부모 세대의 서사와 동행하며, 갈피마다 스며든 파열과 고난의 아우라를.
첫 책에 대한 가족의 반응은 어땠나.
“(미소 지으며) 부모님은 좋아하셨다.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스물여섯살에 변호사를 그만두고 서른일곱살에 첫 책을 출판했으니까.”
편당, 11년 혹은 26년의 창작 기간이라니…지치지 않나.
“Writer’s Block(글길 막힘, 집필 장애 상태)으로 힘들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희한하게도 글쓰기 자체는 간단하다. 어려운 것은 실제로 옳은 내용이어야 한다는 거다. 나는 사회 문제를 다루는 현실 기반 소설을 쓰기 때문에 내가 말하는 것에 대한 정확성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 처음 두 권의 책을 쓸 때는 내가 하는 일의 중요성을 실감하기 훨씬 어려웠다. 하지만 ‘코리안 3부작’ 마지막 작품인 ‘아메리칸 학원’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교육이라는 주제를 탐구하는 것에 내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다고 확신한다. 나는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버틸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
‘똑똑하지는 않지만, 버틸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의 울림이 크게 남았다. 문득 그는 MZ 세대(밀레니얼+Z 세대·1981~2010년생)가 게으르다는 평가는 부당하다고 했다.
“매슬로 욕구 이론의 맨 아래 단계가 생존이다. 그게 충족되면 한 단계씩 더 위로, 꼭대기의 자아실현까지 올라간다. 조부모와 부모 세대가 생존과 안전을 해결해준 덕에, 아이들은 행복을 찾아서 위로 올라간다. 하지만 그거 아나. 생존보다 행복을 추구하는 게 훨씬 더 어렵다. 기본 의식주가 더 간단하다. 윗세대가 생존 방법을 보여줬기에, 다음 세대는 레벨업을 하게 됐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왜 이전 단계를 얘기하나. ‘나는 어디 있나’ ‘여긴 어디인가’ 아이들은 위기에 봉착했다. 청년들 게으르다고 비난하지 마라.”
퀸스에서 신문 가판대, 작은 보석상을 하던 부모와 살던 어린 이민진과 할렘에서 사는 50대 작가 이민진은 무엇이 달라졌나.
“부끄럽지만 나는 거의 변한 것 같지 않다. 많은 면에서 나는 아직도 어렸을 때 믿던 것들을 믿는다. 선과 악을 믿는다. 대부분의 사람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사랑을 원하고 수용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또한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대부분의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끔찍한 일들을 경험하기도 했고 개개의 타인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인생을 살면서 사랑을 지속하고 있고, 매일 긍정적인 면에 집중하고자 노력한다.”
인간 이민진은 굉장한 낙관주의자인 것 같다!
“부모님이 쾌활하신 분들이다. 부모님은 필요할 경우 많은 선한 일을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믿고, 나는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다. 훌륭한 롤 모델을 가질 수 있어서 스스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분들이 내게 작가가 되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기술을 알려주신 것은 아니지만, 내가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어주셨다. 나는 내가 탁월한 문제 해결사라고 믿게 됐다. 그리고 그 믿음의 힘이 내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데려다주었다.”
한국인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보편적인 울림을 줄 수 있을까.
“음악, 문학, 영화 그리고 다양한 미디어 작품에서 한국의 스토리텔러와 창작자들은 서사적 논리를 견지하며 일한다. 시청자는 지능적인 패턴에 반응하기 때문에 그런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 예술가들이 참신함 그 자체를 특권으로 여긴다면, 혹은 독자를 속이기 위해 서사적 논리를 무시한다면 그 즉시 인기를 잃을 거다. 서사적 논리가 없는 이야기가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갖기란 불가능하다.”
재능에 대해 얘기해 볼까. 재능을 의심하고 자기 비하를 통과해내는 과정에서 작가로서의 독특한 무늬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 긴 시간 동안 재능에 의심이 들 때는 어떻게 이겨냈나.
“집중할 수 없을 때는 밖을 걷거나 요리하거나 다른 사람의 책을 읽는다. 다정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사소하지만 좋은 일을 하려고 꾸준히 노력한다. 무엇보다 내 재능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단지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려고 한다. 만약 내게 재능이 있다면 내가 하는 일에서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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