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준의 돈 이야기 <13>] 마크롱의 분노와 오래된 지혜 ‘포지티브섬 게임’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흄은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좋은 친구였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의 전작에 해당하는 ‘도덕감정론’을 통해 상업적 성공을 거뒀던 1759년, 흄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축하 편지를 보냈다.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서점에 몰려들었고, 출판사는 초판의 3분의 2가 팔렸다고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판매 부수만으로 책을 평가하는 것은 속물들이나 하는 짓이지. 속물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은 매우 훌륭한 책임에 틀림이 없다.”
데이비드 흄은 12세에 에든버러대학에 입학해 15세에 자퇴했다. 흄은 재야의 철학자로서 명성을 얻고 나서 에든버러대학의 교수직에 지원했으나 두 번이나 거절당했다. 흄의 회의적이고 비전통적인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그보다 열두 살 어린 애덤 스미스는 옥스퍼드대학 재학 시절 흄 때문에 퇴학당할 위기에 처했다. 당시 철학 교수들이 금기시했던 흄의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자가 스미스의 기숙사에서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흄이 가장 큰 애착을 가졌던 책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지식인이 이 책을 읽었지만 그의 무신론적이고 유물론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외면당했다. 이 책은 그가 죽고 150년이 지난 1938년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와 피에로 스라파(Piero Sraffa)가 ‘인성론 개요’라는 소책자로 발간하면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됐다. 흄은 평생을 귀족 집안의 가정교사, 도서관 사서, 정부의 하급 관료로 살았다. 그가 남긴 대부분의 저작은 은퇴 이후 시골로 내려가서 쓴 것이다.
자유무역주의와 화폐수량설
데이비드 흄의 지적 사유는 1752년 출간된 ‘정치적 담론(Political Discourses)’에 잘 담겨 있다. 그 당시 경제학은 독립된 학문이 아니라 정치학의 일 분과에 불과했다. 1776년 발간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는 흄의 ‘정치적 담론’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그가 좀 더 완전하고 체계적인 경제학 논문을 집필했더라면 애덤 스미스가 아닌 데이비드 흄이 경제학의 창시자로 추앙받았을지도 모른다.
18세기 영국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중상주의자(mercantilist)들은 국부의 원천을 귀금속(금, 은)으로 봤고, 금의 국내 유입을 늘리기 위해 식민주의, 침략 전쟁, 보호무역이라는 수단을 사용했다. 하지만 당대의 철학자 리샤르 캉티용(Richard Cantillon)은 이러한 전술을 자멸적인 것으로 봤다. 왜냐하면 해외로부터 더 많은 금화가 국내(영국)로 유입되면 국내 상품의 가격이 오르고 그 결과 값싼 해외 상품의 국내 유입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무역 대금을 치르기 위해 금화가 해외로 유출되면, 이제 국내에는 빈곤과 파산이 뒤따르게 된다.
흄은 캉티용의 자유무역이론 이외에도 존 로크(John Locke)의 화폐수량설을 받아들여 더욱 정교하게 가다듬었다. 물론 화폐수량설이라는 이름은 1911년 어빙 피셔(Irving Fisher)가 붙인 것이다. 화폐수량설이란 M×V=P×T, 즉 상품 수량(T)과 화폐 유통 속도(V, 돈이 손바뀌는 횟수)가 주어졌을 때, 물가 수준(P)은 화폐 수량(M)에 의해 결정된다는 가설을 말한다.
1911년 만들어진 피셔의 가설은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유명 경제학자들이 화폐금융론을 설명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대부분의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화폐수량설을 피셔의 작품이라고 말하지만, 피셔는 로크에게서 흄으로 이어져 온 고전적 가설을 수학적으로 정리했을 뿐이다. 피셔의 화폐 방정식(M×V=P×T)이 뉴턴의 운동법칙, 즉 물체의 운동량(F)은 질량(M)에 속도(V)를 곱한 것과 같다는 F=M×V와 형태적 유사성을 보이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인플레이션감축법의 노이즈
2022년 8월 16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Inflation Reduction Act)을 확정, 시행한 바 있다. 이 법은 11월 8일 중간선거 승리를 위해 대선 공약이었던 ‘더 나은 재건 계획(Build Back Better Plan)’을 일부 수정해 입법화한 것이다. 이 법의 내용은 1930년 대공황 극복을 위해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제안한 ‘뉴딜 정책’과 유사한 것으로, 2020년 코로나19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확장적 재정 정책을 담고 있다. IRA에 따르면 미국은 향후 10년 동안 에너지 안보 및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해 3750억달러(약 492조원), 의약품 가격 인하를 위해 전국민건강보험에 640억달러(약 83조원)를 투자하게 된다.
특히 IRA는 전기차 구매자들에게 대당 최대 7500달러(약 1000만원)의 세액 공제 혜택을 주는데, 공제 대상이 되려면 배터리 핵심광물의 40%가 미국(또는 자유무역협정 체결 국가)에서 채굴, 가공돼야 하고, 배터리 주요부품의 절반 이상(2028년에는 100%)이 미국 내에서 제조돼야 한다. 결국 미국은 이익을 얻고, 나머지 국가는 손해를 보게 되며, 전 세계 자동차 공장이 미국으로 이전되는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IRA가 파열음을 내고 있다. 11월 30일 미국을 방문한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IRA가 미국에서 최종 조립되는 전기차에 대해서만 세액 공제 방식의 보조금을 지급하게 되는데, 이것은 프랑스에 매우 공격적인 조치다. 미국이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 프랑스의 문제를 키우고 있고, 이것은 결국 유럽 내부의 분열을 일으킬 것”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또한 12월 5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미국의 IRA가 유럽 내 투자 활동을 위축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EU는 국가 보조금 제도를 개편하고, 녹색 기술에 대한 재정 지원을 강화할 예정”이라고 발표했고, 급기야 미 워싱턴포스트는 같은 달 “IRA의 일부 조항이 중국의 친환경 시장 장악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지만, 이것은 (한국 등 여러 국가와 맺은) 자유무역협정에 위반될 소지가 크며, 유럽 등 동맹국들에 심각한 불이익을 줄 수 있다”는 논조의 사설을 실기도 했다.
오래된 지혜 ‘포지티브섬 게임’
사실 미국과 유럽의 무역전쟁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29년 대공황을 촉발한 미국과 유럽의 무역전쟁, 1960년대 시작해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미국산 가금류와 유럽산 픽업트럭에 대한 관세전쟁, 미국산 보잉과 유럽산 에어버스의 보조금전쟁, 2018년 트럼프의 유럽산 철강에 대한 관세 부과와 EU의 미국산 제품군에 대한 보복 관세 부과 등이 그러하다. 이처럼 현대적 중상주의자들은 무역을 경쟁 관계로만 보기 때문에, 한쪽이 이익을 얻으면 다른 쪽은 반드시 손해를 보아야 하는 제로섬(zero sum) 게임을 펼치려 한다.
하지만 철학자 흄은 ‘무역의 질투에 관하여(Of the Jealousy of Trade 1760)’라는 논문을 통해 중상주의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나는 이 협소하고 악의적인 의견(중상주의)에 반대한다. 만약 주변국들이 무지와 게으름과 야만적인 생활에 파묻혀 있다면, 우리(영국) 혼자 교역을 수행하고 국부를 늘릴 수 있을까. 나는 한 국가의 상업과 부가 커지려면 이웃 국가의 상업과 부도 함께 커져야 한다고 감히 단언하고 싶다.” 흄은 우리에게 현대 경제학의 게임이론(Game Theory)이 강조하는 포지티브섬(positive sum) 게임, 즉 참가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게임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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