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전증의 약물 치료 목표는 부작용 없이 발작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약물 치료가 개발되기 이전에 뇌전증은 불치의 병이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갑자기 찾아오는 발작으로, 길거리에서 쓰러져 대경련을 일으키고 몇 분 지나면 다시 일어나 부끄러운 듯 종종걸음으로 상황을 피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1920년도에 페노바비탈을 이용한 약물 치료가 처음 시도되었고, 1940년도에 페니토인이 처음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뇌전증 환자들의 발작은 점차로 조절되기 시작하였다.
약물 복용으로 뇌전증 환자들은 발작이 줄면서, 과거보다는 더 나은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우리나라에서 장미회가 서울 기독의사회와 함께 뇌전증 약을 각 지역 교회의 무료진료소에서 봉사에 참여한 의사들을 통하여 제공하기 시작했던 것이 1965년이었다. 미국에서 파송된 의사 로빈슨 선교사와 장미회 창립 이사장이신 박종철 박사님, 신경외과 의사로 인천 기독의사회를 이끄시던 강우식 박사님, 연세의대 예방의학교실의 김명호 교수님 등이 이 시기의 장미회를 함께 이끄시면서, 뇌전증 환우들에게 약을 제공하는 진료를 해왔다. 당시에는 약을 구하기가 어려워 로빈슨 선교사가 미국이나 독일에서 직접 약을 구입하거나 기증 받아 장미회에 전달하였다.
항발작 약은 90년대 초반까지 5종 이내의 약만 사용되었으나, 이후 폭발적으로 새로운 약물들이 개발되기 시작하여, 지금은 30종에 이르는 약제가 사용되고 있다.
새로 개발된 약제들은 기존의 약제가 가지고 있던, 인지, 기억, 활력 저하와 장기간 복용에 따른 신체 부작용(성인병, 골감소증, 호르몬 장애) 같은 장단기 부작용을 현저히 감소시키는데 성공하였지만, 발작 치료면에서는 뚜렷한 도움을 주지는 못해서, 약물로 조절되지 않는 뇌전증의 비율은 이전과 거의 비슷한 전체 뇌전증 환자의 30% 정도로 지속되고 있다.
약물 치료는 기본적으로, 신경 세포가 전기 신호를 만드는 것을 방해하는 약제와, 전기 신호 생산을 억제하는 GABA라는 신경전달물질의 작용을 강화하여 강한 전기 발생을 억제하는 두 가지의 방법으로 작용한다. 각 약제들이 가지고 있는 기전들에 조금씩의 차이가 있어서, 한가지 약으로 조절되지 않을 경우 기전이 다른 약으로 바꾸거나, 추가하여야 좀더 나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약물을 선택할 때는 어떤 종류의 발작인지, 어떤 종류의 뇌전증인지에 따라 가장 효과적인 약제를 시작한다. 또 발작의 빈도나 강도, 연령, 성별, 임신 계획, 학업 정도나 직업, 다른 질환 동반 여부, 심리-정서-사회적 요인, 그리고 (부작용이 없는 약은 없으므로) 어느 정도의 부작용까지 감당하는 것이 적절할지와, 가격, 복용 횟수, 증량 방법 등을 포괄 적으로 고려하여 선택한다.
뇌전증 치료 약물은 과거에 항뇌전증약 또는 항경련제로 불리웠으나, 약제가 뇌전증 자체를 치료하는 약제가 아니라는 점과 뇌전증의 증상이 경련을 동반하지 않는 발작도 많이 일으킨다는 점 등을 감안하여, 최근에는 항발작약제로 통일되어 불리고 있다.
항발작 약물은 가장 많은 빈도의 국소뇌전증(의식 소실 발작 및 대경련 포함)을 치료 대상으로 하는 약제와 소발작(과거에 결신 발작, 결여 발작으로 불리던 소아에서 주로 발생하는 의식 장애를 일으키는 발작) 약제로 크게 나눌 수 있고, 또 다르게는 국소 발작 약제와 전신 발작 약제로 나누기도 한다. 어느 한쪽에만 효과적인 약제도 있지만 최근에는 양쪽에 모두 효과적인 범용 약제들도 많이 개발되어 있다. 국소 발작에 특화된 약물은 소발작이나 근간대 발작과 같은 전신 발작을 악화시키는 경우도 있어, 약물 선택에는 항상 주의가 요구된다.
약 30종에 이르는 약제는 국소뇌전증에 시용되는 약, 전신뇌전증에 사용되는 약, 그리고 범용으로 사용되는 약제로 나눌 수 있고, 전신뇌전증 약제는 소발작, 근간대발작, 탈력발작, 연축에 효과적인 약제로 따로 구분한다. 소발작에 특화된 약제는 에소숙시마이드(Ethosuximide, 자론티, 자론틸), 발프로인산(valproic acid, 오르필, 데파코트, 데파킨, 프로막), 이 두 종류가 대표적이고, 근간대 발작에는 여기에 더해 클로바잠(clobazam, 센틸), 조니사마이드(zonisamide, 엑세그란), 그리고 연축에는 비가바트린(vigabatrin, 사브릴), 스테로이드(prednisolone, 소론도, ACTH)가 일차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 개발된 약제들은 좀더 효과적일 수 있지만, 부작용면에서 아직 충분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단점도 있다.
국내제약회사에서 개발된 세노바메이트(cenobamate, Xcopri, 엑스코프리)는 이전 약제에 비해 국소뇌전증에 좀더 강력한 약제로 알려져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미 사용되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검증 과정에 있고, 대마씨유에서 추출한 에피디올렉스는 고가인데다, 아직 안전성이 완전히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주 심한 약물 난치성 뇌전증에만 일부 제한적으로 허용되고 있다.
약물 치료의 목표는 부작용 없이 발작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완벽한 약제는 없어서 이 모두를 충족시키는 것은 아직 가능하지 못하지만, 최대한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은 필요하다.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모든 약제가 신경 신호 생산을 방해하거나 생산된 신호를 억제하는 방법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부작용이 전혀 없이 발작만 멈추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발작 억제력이 강력제할수록 부작용도 심한 것이 일반적이지만, 발작 조절 능력과 부작용 발현 정도도 모두 개인차가 있어서, 환자의 상황에 맞춰 최대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약제를 선택하는 것이 필요하다.
발작에 맞게 선택한 첫 번째 약으로 발작이 완전히 조절되는 경우는 약 50% 정도이며, 추가적인 약물 조정으로 발작이 완벽히 조절되는 경우가 전체의 70% 정도 된다. 약물로 발작이 완전히 조절되지 않을 때는 완치를 보장할 수 있는 다른 치료 방법을 고려해야 하며, 이 경우 약물 치료보다 더 어려운 수술이나 케톤생성 식이요법으로 대변되는 식이 치료를 고려해야 한다. 최근 개발된 약제를 추가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고, 미주신경 자극장치 삽입과 같은 추가 치료를 고려할 수도 있지만, 발작이 완전히 조절되지 않는 경우 발작 억제와 약물 부작용 사이에서 최선의 타협점을 찾아가는 것도 한 가지 선택이 될 수도 있다.
뇌전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모든 의료진과 환우들의 바람이다. 많은 의료진과 뇌과학자들이 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고, 그 결과로 언젠가는 이런 시기가 올 것이라는 꿈과 희망을 갖고 있다.
김흥동 우버객원칼럼니스트(세브란스 어린이병원 소아신경과 교수, 한국뇌전증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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