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영화 시장, 메마른 극장가 적실 단비 되나?
아이즈 ize 윤지훈(칼럼니스트)
"왼손은 거들 뿐!"
이 말을 기억한다면, 그것도 가슴을 울리는 명대사로 단박에 떠올릴 수 있다면, 당신은 적어도 3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대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만화를 평균 이상으로 많이 들여다본 사람이거나 마니아에 가까운 애호가일지도 모른다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그렇다. 스포츠만화의 상징처럼 남은 농구만화 '슬램덩크' 속 '리바운드의 왕' 강백호의 대사다. 최근 이 대사가 새삼 세상에 새롭게 회자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출판 만화 역시 서점가를 휩쓸며 추억으로 재소환되고 있다.
만화 '슬램덩크'는 새해 첫날인 지난 1월1일 인터넷 서점 예스24에서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1990년 주간 '소년점프'를 통해 연재돼 1996년 막을 내린 원작 가운데 24화를 재편집한 특별판 '슬램덩크 챔프'이다. 또 다른 인터넷 서점 알라딘은 '슬램덩크 도서전'을 열면서 1600명의 독자를 대상으로 만화 속 최고의 대사를 꼽는 설문을 벌이기도 했다. 물론 "왼손은 거들 뿐"이 46%의 지지를 얻어 최고의 대사로 기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슬램덩크'에 대한 관심을 주도하는 세대, 바로 30~40대이다. 예스24의 경우 전체 구매자 가운데 87%를 기록했을 정도이다.
# 애니메이션 영화, 뜨겁다
'슬램덩크 챔프'는 원작만화를 영화화한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The First Slam Dunk)'가 지난 4일 개봉하면서 이에 맞춰 출간됐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1990년대 원작만화를 사랑한 30~40대를 중심으로 큰 관심을 모으면서 출판만화의 인기에도 힘을 보탰다는 분석이 주류를 이룬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북산고 농구부 선수들의 이야기를 그린 만화 '슬램덩크'를 원작 삼은 극장용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원작자인 이노우에 다케히코 작가가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한 작품이다. 지금까지 전 세계 1억2000만부가 팔려나간 스테디셀러인 원작의 인기를 재확인시켜주듯 국내 만화잡지에 연재될 당시 뜨거운 사랑을 보낸 10대들, 이제는 30대 중반 이후 나이가 된 이들의 애정 가득한 시선을 받고 있다.
실제로 국내 최대 멀티플렉스 CJ CGV를 비롯해 롯데시네마 등에서 영화를 관람한 관객 가운데 30~40대가 80% 안팎의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영화는 개봉 첫날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박스오피스 2위로 출발해 윤제균 감독의 '영웅'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과 함께 또 한 편의 애니메이션 영화 '장화신은 고양이:끝내주는 모험'도 9일 현재 박스오피스 4위에 오르며 인기를 누리고 있다. 2001년 흥행 애니메이션 '슈렉'에 처음 등장한 뒤 순수한 듯 커다란 눈망울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은 캐릭터 장화신은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2011년 '장화신은 고양이'의 후속편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여파와 극장 영화 관람료 인상 등 환경으로 인해 전체 극장 관객이 크게 줄어든 상황이어서 절대적인 관객수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22만9000여명을 모았지만, '아바타:물의 길', '영웅' 등 대작들과 당당히 경쟁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선을 모은다.
여기에 이날 현재 박스오피스 8위인 '신비아파트 극장판 차원도깨비와 7개의 세계'까지 포함하면 2023년 1월 극장가에서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강세를 과시하고 있다고 할 만하다. 세 작품은 전체 혹은 12세 관람가 등급을 받아 초등학생까지 관람이 가능한 작품들로, 겨울방학 시즌을 겨냥해 흥행세를 달리고 있다.
# '귀멸의 칼날'과 '소울'로부터
사실 방학 시즌 애니메이션 영화의 흥행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하지만 2020년 감염병 확산 이후 이렇다 할 초대형 흥행작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적어진 상황에서 몇몇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한 관객의 관심이 뚜렷하게 높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지난해 말 내놓은 '2022 애니메이션 산업백서'를 들여다보면 더욱 그렇다. '2022 애니메이션 산업백서'는 전국 만 3~69세 전 국민 가운데 2021년 7월부터 1년 동안 애니메이션 콘텐츠를 '2~3개월에 1회 이상' 관람한 35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를 실었다. 이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평균 관람 횟수는 "약 1.0회로 2017년 이후 매년 지속적으로 감소하다 2022년 0.2회 상승"했다. 이용 선호 매체로 극장을 꼽은 응답자도 29.6%로, 2021년 22.8%나 2020년 25.7%보다 늘어났다.
이 같은 흐름은 2021년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극장판 귀멸의 칼날:무한열차편'과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명가 월트디즈니의 '소울'이 주도했다.
'극장판 귀멸의 칼날:무한열차편'은 2021년 1월27일 개봉한 뒤 누적 215만여명을 불러 모아 그해 전체 박스오피스 7위에 올랐다. '소울'은 그보다 일주일 앞서 선보여 204만8000여 관객 수치로 연간 흥행 9위를 차지했다. 이에 힘입어 1위 '스파이더맨:노 웨이 홈'과 3위 '이터널스', 4위 '블랙 위도우', 5위 '분노의 질주:더 얼티메이트' 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42.7%의 관객 점유율로 다른 장르를 압도"한 상황에서 애니메이션 영화는 15.0%로 2위의 규모를 과시했다.(영화진흥위원회, '2022년 한국영화연감')
영화진흥위원회의 '2021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도 "애니메이션은 905만명의 관객을 모았고, 관객 점유율도 2020년 5위에서 네 계단 상승했다"고 썼다. 이어 "코로나19 3차 유행의 직격탄을 맞았던 2021년 초반 극장가에서 이들 애니메이션의 흥행이 관객의 발길을 극장으로 되돌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아이 같은 어른"들, 애니메이션으로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단위 관객에 머물지 않고 20대를 비롯한 그 이상 연령대 관객의 애니메이션 영화를 향한 발길이 더욱 잦아지는 추세라는 점이다. 최근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주 관객층이 30~40대라는 점 역시 이와 같은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다. 이미 '극장판 귀멸의 칼날:무한열차편'과 '소울'이 흥행할 당시 극장가는 20대 이상 연령대 고정 관객 유입과 이들의 n차 관람이 그 큰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출판만화를 원작으로 한 '극장판 귀멸의 칼날:무한열차편'의 경우 관련 단행본 등 다양한 굿즈를 소장하려는 일부 관객의 욕구도 영향을 미쳤다는 시선이 나오기도 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수입사가 오는 26일부터 서울과 대구에서 관련 팝업스토어의 문을 열어 한정판 피규어와 유니폼을 비롯한 200여 굿즈를 선보이기로 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2 애니메이션 산업백서'도 애니메이션 영화의 인기에 대해 "1인 가구 증가, '아이 같은 어른'(키덜트) 문화 확산 등 애니메이션 소비계층의 변화"를 주요 요인으로 꼽은 바 있다. '2022 애니메이션 산업백서'에 담긴 앞선 조사 결과도 이를 잘 보여준다.
10대와 20대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평균 관람 횟수가 다른 연령층보다 많은 1.4회로 나타난 가운데 '최근 1년 재밌게 본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묻는 질문에 27.6%의 응답자가 '귀멸의 칼날'을 가리켰다. 33.6%의 지지를 얻은 '보스 베이비2'에 이은 2위이다. 특히 20대와 40대 응답자가 가장 많이 선택했다. '즐겨 시청한 스마트 기기 애니메이션' 작품을 묻는 질문에서도 '귀멸의 칼날'이 14.3%로 1위에 올랐다. 역시 20대와 40대 응잡자가 이를 첫 손에 꼽았다.
그렇다면 이 같은 추세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애니메이션 영화가 관객을 끌어모으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향후 긍정적인 전망을 밝히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앞선 통계 지표에서 읽을 수 있듯,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한 관심 특히 20대 이상 성인 관객의 발길이 조금씩 그리고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는 점, 방학 시즌이라는 환경적 요인에 기댄 흥행작이 매년 나오고 있다는 점 등은 희미하게나마 기대를 갖게 한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2 애니메이션 산업백서'의 조사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일상생활 복귀 시, 극장 애니메이션 관람 변화'에 관한 설뭉에서 응답자의 40.1%가 "증가할 것"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감소할 것"이라는 응답이 15.6%에 머문 가운데 "지금과 비슷할 것"이라는 답변이 44.3%로 가장 높았다. 그만큼 극장을 찾아 애니메이션 영화를 볼 것이라는 관객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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