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경영지원본부 칼럼] 시간의 새끼줄에 하나씩!

정양범 매경비즈 기자(jung.oungbum@mkinternet.com) 2023. 1. 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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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문화권에서 상석(上席)의 개념과 그 준수는 철저하다. 회의실에는 서열에 따라 명시적 또는 암묵적으로 지정된 자리가 있다. 대개 회의 주관자로부터 가까운 자리가 제일 상석이고 멀수록 낮은 직급이 앉게 된다. 남미 사람들에겐 그런 개념이 없다. 회의실에 도착한 순서대로 앉기 시작한다. 맨 늦게 도착한 팀장의 자리가 없는데도 팀원들은 누구도 양보 안하고 그대로 앉아 있으면 회의 주관자인 한국 경영자가 오히려 민망해진다.

코로나 이후 사무실에서 상석의 개념은 희미해지고 있다. 지정좌석제가 아니고 출근해서 자율적으로 선택하여 앉으니 상석 또한 없다. MZ세대 생각으로는 방에 있는 중역으로부터 먼 자리 또는 창가의 전망 좋은 자리가 상석이라면 상석인데, 직급에 상관없이 먼저 앉으면 임자이다. 또 재택근무의 보편화로 최소한 직장 소재한 국가 안에서 일해야 한다는 근무 공간의 제한도 없다. 뉴욕에 직장이 있는 딸은 한국에 와서 시차상 밤에 재택 근무하고 낮에는 친구 만나러 다닌다. 신의 영역같이 보이던 우주의 시공(時空)에서, 초연결사회(Hyper-connected Society)로의 발전 덕분에 지구상 공간은 이제 인간이 초월하는 범주로 들어왔다. 따라서 공간에 따른 문화적 차이는 희미해 진다. 그러나 시간은 아직 그렇지 않다.

과학과 문명의 발전으로 인류는 어지간한 것은 다 알아냈지만 여전히 그 정체조차 파악 못하고 있는 것이 시간이다. 미국 천문학자 허블(Edwin Hubble)은 별들은 빠른 속도로 우리와 멀어지고 있다는 우주 팽창론을 1929년 발표하였고, 그것이 우주의 탄생에 관한 빅뱅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시간의 역사>를 쓴 스티브 호킹 박사 등 과학자들은 시간은 빅뱅으로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존재하지만, 언젠가는 즉, 우주의 팽창이 한계에 달했을 때 시간도 멈출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시간의 나이는 우주와 동갑인 138억 년이다. 빅뱅 이전에 시간은 없었다. 호킹 박사는 “우주와 그 질서의 법칙은 어떤 신성한 존재에 의해 만들어졌을지도 모르지만, 빅뱅 이후에는 우주와 시간은 그 법칙에 따라 스스로 흘러가도록 방치되었고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라 말했다.

사람은 누구든지 시간은 흘러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눈으로 본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자연의 변화, 생로병사 등 모든 우주의 변화와 사건을 보고 그것을 인지하기 위해 시간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만들었다. 시간의 새끼줄에 인간이 보고 겪은 모든 사건과 변화 그리고 자신이 한 일을 굴비처럼 엮어 놓으니 그것이 기억이 된다. 인간은 그 새끼줄에 묶인 사건과 변화의 앞뒤를 구분하여 순서대로 기억할 수 있고, 시간의 흐름을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작가는 “시간은 계속 생성되는 기억에 불과하다”라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시간도 에너지와 같은 물리적 양(量)으로 본다. 그 양은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표한 후로 시간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즉, 세상에는 누구에게나 같은 하나의 시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장소와 관측자의 속도에 따라 시간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아인슈타인이 증명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위대한 발견 이전부터 각국의 사람들은 자신의 환경과 종교에 맞게 시간의 속도와 개념을 정립하였고 그 활용 방법을 관습화 시켰다. 그것이 시간의 문화이다.

시간을 고무줄 같이 신축성 있게 받아들이는 문화도 있고, 반대로 철사처럼 팽팽하게 여기는 문화권도 있다. 시간의 새끼줄은 끝도 시작도 없이 돌고 도는 원형(圓形)이고 그 줄을 타고 인간과 축생이 윤회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동양 문화이다. 반대로 시간은 화살처럼 한 방향 직선으로 흘러가니 선형(線形)이라고 생각하는 서구 문화도 있다.

원형이든 선형이든 빅뱅에서 시작하여 무한하게 이어지는 시간의 길고 긴 새끼줄을 과거, 현재, 미래로 억지로 토막 낸 것은 동서양 공통이다. 그 삼자 간의 경계는 주관적이고 애매모호하다. 어디까지가 과거이고 언제부터 미래인지는 각 문화권마다 다르다. 예컨대, 한국인에게 과거는 최소 몇 달 전의 일이지만 미국인에게 과거는 겨우 몇 일 또는 몇 주전의 일이다. 우리에게 미래 장기사업계획이라면 향후 몇 년 동안의 계획이지만, 미국인에게는 몇 분기 이후의 일이다.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아시아나 유럽이 ‘과거중시 문화권’이라면, 중남미 국가는 ‘현재지향성’이고, 미국은 ‘미래지향성’ 문화이다. 과거중시 문화권에서는 조상, 선배, 연장자에 대한 존경을 표시한다. 모든 것을 전통과 역사의 맥락에서 파악하며, 미래의 비지니스에 대해서는 장기적으로 고려하여 결정하려 한다. 이 문화권의 영화나 드라마는 사극이나 과거의 일에서 소재를 얻은 것이 많다. 반면에 중남미인들에게는 현재가 제일 중요하다. 그들에게 격주로 급여를 지급하지만 미래를 위한 저축은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그곳 가난한 민중에게는 정부가 무엇인가를 퍼주는 포퓰리즘이 통하고 좌파 정치인은 늘 그것을 이용한다.

미국인은 미래지향성으로 분류된다. 현재와 과거는 미래의 이익을 위해 매몰차게 이용된다. 미래는 현재라는 시점에서 통제 가능해야 한다. 그래서 미래 계획의 단위는 한국보다 짧다. “눈 앞의 실적에만 급급하다”라는 비판을 받지만 미국 CEO들은 매 월, 매 분기 실적에 목을 건다. 현재의 성공만이 미래의 더 큰 성공을 가져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간 활용 방법도 문화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시간이라는 새끼줄의 일정 간격마다 한 마리의 굴비를 엮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한꺼번에 두 마리씩 엮는 사람들도 있다. 미국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Hall)은 그의 저서 <침묵의 언어; The Silent Language>에서 이를 ‘순차적(Monochronic) 시간문화’와 ‘복합적(Polychronic) 시간문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전자 문화는 시간대 별로 하나의 일만 순차적으로 해 나가며, 미국, 독일, 스위스 사람들이 그렇다. 반면 후자 문화권의 사람들은 동시에 두 가지 이상의 일을 하는 때가 많은데, 아시아, 터키 그리고 남미가 그렇다고 한다.

한국인 관리자가 미국에 출장 가서 미국인 상사의 방에 들어갔다. 마침 상사는 통화 중이었고, 한국인을 보자 손만 흔들어 아는 체하고 계속 통화를 했다. 한국인은 앉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미국인은 통화가 끝나고서 비로소 Welcome 인사를 했지만 한국인은 기분이 상했다. 복합적 시간문화의 한국인은 아무리 바쁘더라도 잠깐 통화를 중단하고 인사를 나눌 것으로 기대했지만, 순차적 문화의 미국인은 우선 하던 일을 다 끝낸 다음에 하려 했던 것이다.

순차적 시간문화의 비지니스 사회에서는 약속, 일정, 최초 계획을 중시하며, 승진에 있어서도 가장 최근의 성과가 중요한 요소로 고려한다. 반면 복합적 시간문화에서는 공동체적 인간관계가 중요하므로 시간 약속은 관계에 따라 언제든지 변경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고, 회의 시간도 고무줄이다. 승진에 있어서 긍정적 인간관계가 결정적이고, 최근 실적보다는 과거 전체의 실적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침묵의 언어>에 나오는 한 예가 있다. 미국 비즈니스맨이 일본에 출장 왔다. 협상은 잘 안됐다. 미국인이 귀국 비행기 편을 확정하자 그제서야 일본인은 중요한 타협안을 제시했다. 순차적 문화의 미국인은 귀국 일정을 미루기보다는 일정 안에 끝내기 위해 그 타협안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점을 일본인이 이용한 것이다.

이제 해외에 파견된 우리 초국적기업 임직원들은 거의 순차적 시간문화로 갈아탔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만큼 시간관리의 효율성과 성과 중심 경영에 적응했다는 의미이다. 남미에서 근무할 때, 퇴근 시간 10분 전 또는 금요일 오후 늦게 중요 결재 서류를 들고 와서 빨리 결정해 달라는 현지인 간부가 종종 있었다. 그는 한국 경영진이 순차적 시간문화에 속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시간의 새끼줄에 굴비 한 마리씩만 차분차분 엮어 나가는 순차적 시간문화를 생활화하자. 그것이 국제 비지니스에서 효율적 시간경영이고 명확한 의사 결정을 위한 기업문화이다.

[진의환 매경경영지원본부 칼럼니스트/ 현) 소프트랜더스 고문/ 서울대학교 산학협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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