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남수의 視線] 대통령 신년사의 ‘문제적 대목’
지난 2일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첫 신년사를 발표했다. 역대 대통령들은 신년이 되면 기자회견을 통해 국정운영 구상과 당면한 현안에 대해 견해를 밝혀왔다. 윤 대통령도 취임과 함께 국민과의 소통을 강화하겠다면서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이전해 도어스테핑(출근길 약식회견)까지 했다. 그러나 도어스테핑 중단과 함께 신년 기자회견도 9분 가량의 짧은 신년사를 발표하고, 대표적 보수 신문인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로 대신했다. 언론 입장으로서는 경험하지 못한 윤 대통령의 신년 행보였다.
윤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세계 경제의 복합위기와 불확실성으로 어려운 경제상황이 예상된다면서 금리 인상 조치에 따른 부담이 가계와 기업에 확대되지 않도록 선제적으로 관리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우리 경제의 근간이고 일자리의 원천인 수출로 위기를 돌파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면서 WTO체제가 약화되고 보호주의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안보, 경제, 기술협력 등이 패키지로 운영된다고 했다. 그리고 노동과 교육, 연금 등 3대 개혁과제를 제시했다.
신년사 중 특히 필자가 문제가 있다는 대목은 이 부분이다. “우리의 수출전략은 과거와는 달라져야 합니다. 자유, 인권, 법치라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들이 경제와 산업을 통해 연대하고 있으며, 보편적 가치를 기반으로 한 연대는 지금의 외교적 현실에서 가장 전략적인 선택입니다. 모든 외교의 중심을 경제에 놓고, 수출전략을 직접 챙기겠습니다. ‘해외 수주 500억불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인프라 건설, 원전, 방산 분야를 새로운 수출 동력으로 육성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의 수출전략은 과거와는 달라져야 합니다’는 대목에는 당연히 동의한다. 세계 10대 수출강국으로 우뚝 섰지만, 언제나 혁신하고 변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것이 현실이다. 오늘날 한국경제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기존의 관행에 빠지지 않고 늘 변화하고자 했던 노력 때문이었다. 값싼 노동력을 중심으로 하는 경공업으로 출발해 중공업으로 덩치를 키웠고, 여기에 머물지 않고 지속적인 기술혁신으로 대외 경쟁력을 갖추면서 우리는 비약적 발전을 할 수가 있었다. 그저 한 가지에 매몰돼 집착했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후진국 처지를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적 대목은 그 다음이다. ‘자유, 인권, 법치라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들이 경제와 산업을 통해 연대하고 있으며, 보편적 가치를 기반으로 한 연대는 지금의 외교적 현실에서 가장 전략적인 선택입니다’ 윤 대통령의 전략적 선택은 이른바 ‘가치동맹’을 말하는 것 같다. 자유와 인권, 법치라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들의 연대가 근간이 된다는 의미다. 사실상 윤석열 대통령의 대외정책의 기본인식이 담겨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무엇보다 미국과의 동맹 강화를 최우선에 두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문제는 한미 동맹 강화가 아니라, 중국과의 관계 악화도 감수하겠다는 의지다.
그동안 한국 정부는 중국을 의식해 미국의 대중국 아시아·태평양 전략인 쿼드에 가입하지 않고 비교적 중립적인 포지셔닝을 취해왔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미국 중심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의 한 축에 끼어들 태세로 바뀌었다. 미국의 세계 패권전략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유럽은 러시아를 겨냥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진으로, 아시아는 중국을 겨냥한 인도·태평양 전략이다. 트럼프 대통령 시절 미·중 간 갈등이 격화되면서 부활한 쿼드(QUAD)의 위상도 격상됐다. 쿼드 참가국인 미국과 인도, 호주, 일본의 정상들은 연이은 회담을 통해 대중국 견제전략을 구체화했다. 바로 자유와 인권, 법치라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들과의 연대 강화를 외교 목표로 두겠다는 윤 대통령의 신년사도 이를 담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와 중국은 지난해 수교 30주년이 됐다. 수교 이후 양국은 활발한 교류를 전개해 왔다. 정치체제는 달랐지만, 중국의 엄청난 물산과 인력을 활용한 한국 기업의 진출은 그야말로 괄목상대했다. 중국은 우리의 주요 수입국이면서 동시에 수출국이었다. 그런데 이번 윤 대통령의 신년사를 통해 일단 중국과의 교역에서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가치동맹에 기초한 교역을 중심해 두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경제적 손실뿐만 아니라, 남북관계에서 완충역할을 하는 중국의 존재 의미도 줄어들 수밖에 없게 된다. 한반도의 위기를 해결할 중요한 키를 버리게 되는 셈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8월 15일 광복절 기념사를 통해 북한이 실질적으로 비핵화를 추구하면 획기적인 지원을 통해 북한 경제를 발전시키도록 전폭지원하겠다는 이른바 ‘담대한 구상’을 발표했다. 미국도 이 구상에 지지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담대한 구상에 대한 북한의 대답은 알다시피 계속되는 미사일 발사였다. 여전히 한반도 상황은 예측불허의 위험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먹구름이 낀 경제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도 불안한 동북아 정세, 나아가 미·중, 미·러 간 세계패권을 둘러싼 신냉전 기조에 따른 것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일방의 가치동맹으로 우리의 외교력을 한정 지으면서 어떻게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을까.
천남수 강원사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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