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선 못 누릴 스토리… ‘이생망 세대’ 열광하다

안진용 기자 2023. 1. 9. 09: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돈과 ‘빽’이 없어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된 ‘더 글로리’의 문동은(송혜교 분)은 공장에서 일하며 검정고시를 치러 교사가 된 후 가해자들을 상대로 복수를 꿈꾼다. 넷플릭스 제공
‘재벌집 막내아들’의 진양철(위 사진)과 ‘작은 아씨들’의 오인주는 돈을 향한 야망을 감추지 않는 인물이다.

■ ‘富·계급’ 뒤엎은 드라마에 카타르시스 왜?

700억원 돈방석 ‘작은 아씨들’

학폭에 처절한 복수 ‘더 글로리’

인생 리셋한 ‘재벌집 막내아들’

돈과 계급사회 신랄하게 그려

박탈감에 희망 꺾인 ‘이생망들’

强者도 일확천금도 어렵지만

약자들의 반격 보며 대리 만족

“그게 돈이 됩니까?”(‘재벌집 막내아들’ 2화 中) 2022년 말을 장식한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부제목은 ‘재벌 진양철의 탄생기’라 할 만하다. 재벌이라는 산물을 낳았지만, 돈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공감하는 이들이 적잖았다. 돈이 되지 않으면 행(行)하지도 취(取)하지도 않겠다는 그의 자세는 오포 세대, 칠포 세대를 넘어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을 외치는 세대들의 판타지이자 지향하는 바다. 그리고 그런 정서는 최근 대중의 지지를 받는 주요 콘텐츠를 관통한다.

◇왜 돈일까?

계급 투쟁은 인류의 역사를 굴리는 커다란 바퀴다. 신분제가 사라진 현대사회에서 계급을 가르는 매개체는 대개 ‘돈’이다. 이는 지난 2020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거머쥔 영화 ‘기생충’, 같은 시상식에서 호아킨 피닉스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긴 ‘조커’를 통해 명징하게 드러났다.

지난달 30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돼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받는 배우 송혜교 주연작 ‘더 글로리’의 소재는 학교폭력(학폭)이다. 하지만 학폭을 불러온 것은 부(富)의 격차다. 가진 자가 가해자고, 없는 자가 피해자다. 가졌기에 공격하고, 가졌기에 무마한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제일 쉬운 문제라니깐”이라는 가해자들의 대화가 섬뜩한 이유다.

이런 돈의 논리는 지난해 방송된 드라마 ‘작은 아씨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헤어질 결심’의 정서경 작가는 이 작품에서 “가난은 겨울옷에서 티가 난다” “가난하게 컸어? 하도 잘 참아서” 등의 대사를 썼다. ‘가난 혐오’라는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저 문장 안에 담긴 송곳 같은 날카로움을 거부할 순 없다.

이 외에도 시련을 딛고 카지노의 왕으로 거듭나는 한 남자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카지노’(디즈니+), 거액과 희대의 사기꾼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담은 ‘빅마우스’(MBC) 등 돈을 소재로 다룬 작품들이 각 플랫폼을 대표하는 콘텐츠로 거듭났다.

다루는 돈의 단위도 달라졌다. ‘재벌집 막내아들’에서는 조 단위 거래가 오가고, ‘작은 아씨들’에서는 비자금 700억 원의 향방을 쫓는다. 가상화폐, 부동산 투기 등으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웬만한 액수는 성에 차지 않는다. 과거 ‘무한도전’에서 방송인 박명수가 했던 명언(?)을 빌리자면 “티끌 모아 티끌”이다. 평생 일해 집 한 칸 마련할 수 없는 이들이 “이생망”을 외칠 수밖에. 정 작가는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사람들이 ‘비트코인 하냐’ ‘주식 올랐냐’ 등 정말 돈 이야기를 많이 한다. 젊을수록 돈 이야기를 많이 하던데, 돈을 실물로 만져보고 쓸 수 있는 기회가 부족한 세대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결핍 아닐까”라고 되물었다.

◇왜 ‘약자의 연대’일까?

돈을 다룬 일련의 콘텐츠가 가진 구조는 유사하다. 주인공은 대개 돈이 없거나, ‘빌런’에 비해 상대적 약자다. 그들이 한순간에 일확천금을 얻을 순 없다. 대신 그들은 연대한다.

‘더 글로리’에서는 학폭 피해자, 가정폭력 피해자, 살인사건 피해자의 가족 등 상처 입은 이들이 손을 잡는다. ‘작은 아씨들’에서 돈 앞에 흔들리던 가난한 세 자매는 똘똘 뭉쳐 괴력을 발휘한다. ‘재벌집 막내아들’ 역시 미래의 기억을 간직한 채 부활한 ‘흙수저’ 남성이 주인공이다. 그가 외국계 투자회사 등과 손잡고 거대 재벌 해체에 나선다는 측면에서 약자의 연대로 분류될 수 있다.

반대로 돈을 쥐고 먹이사슬의 상단에 있는 자들은 분열한다. ‘더 글로리’의 학폭 가해자들은 내가 살기 위해 언제든 상대를 배신할 준비를 하고 있다. ‘재벌집 막내아들’ 속 재벌가 사람들은 핏줄보다 돈줄이 귀하다. 약자의 연대에 강자의 연대로 맞선다면 이길 도리가 없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돈을 나누지 않는다. 그랬기에 부자가 됐고, 그래서 연대한 약자에게 당한다.

최진봉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현대는 돈이 계급을 만드는 사회이고, 요즘 젊은층은 기성세대 이상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세대이기에 포기도 빠르다”면서 “현실에서 이런 구조를 깨기 어렵기에 드라마나 영화 같은 콘텐츠 속 약자의 연대를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최 교수는 “이런 약자의 반격을 통해 궁극적으로 무언가 깨닫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못하는 것’을 대신 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은 아쉽다”고 말했다.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

[ 문화닷컴 | 네이버 뉴스 채널 구독 | 모바일 웹 | 슬기로운 문화생활 ]

[Copyrightⓒmunhwa.com '대한민국 오후를 여는 유일석간 문화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구독신청:02)3701-5555 / 모바일 웹:m.munhwa.com)]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