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종횡무진 화력, 화폭 밖으로 솟구치다

노형석 2023. 1. 9.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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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택 작가의 이인성미술상 수상 전시 ‘대화’
유근택 작가의 대작 <유적-토카타(질주)>(1991)의 일부분. 길이 40m 화폭에 친할머니의 삶을 한국 근현대사 인물 군상과 함께 풀어냈다. 노형석 기자

그의 작업은 탱크의 기동을 보는 것 같다. 몸부림치듯 사지를 움찍거리며 붓든 손을 거칠게 휘놀린다. 그러면서 눈은 쉴 새 없이 꽂힌 대상과 풍경을 번득이며 주시한다.

한국화에서 출발한 중견화가 유근택(57)씨는 지난 30여년간 한국 회화의 구릉과 평원을 사정없이 종횡무진 달려왔다. 종이와 붓, 먹을 놀려 산수와 문인화를 그리는 이른바 전통 동양화 구도를 진작부터 벗어던졌다. 소재와 기법, 재료 면에서 머뭇거림 없이 실험과 돌파의 시도를 거듭했다. 그 결과물로 어떤 작가도 쉽게 따라올 수 없는 전방위적인 작업 영역을 구축했다. 2000년대 이래 그가 국내 화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떠오른 건 당연한 귀결이기도 했다.

대구미술관에서 지난 11월18일부터 새해 1월15일까지 22회 이인성미술상 수상 기념으로 열리는 유근택 작가의 대규모 개인전 ‘대화’는 21세기 한국화를 넘어 한국 회화에서 전인미답의 경지를 탐색해 들어가는 작가의 화력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유근택 작가가 지난해 완성한 <폭포> 연작 중 일부분. 중력을 딛고 하늘로 치솟는 물방울들의 연속된 자취인 분수의 한순간들을 묘사하면서 시간의 폭력성, 삶의 순간성에 깃든 비의들을 은연중 깨닫게 한다. 노형석 기자

노환으로 병상에서 투병 중인 아버지와의 편지 대화를 그림으로 옮긴 신작 연작들로 시작하는 전시는 회고전에 대형 신작전을 더한 얼개를 띤다. 일상 풍경의 불가해한 부분들, 상상력을 촉발하는 틈새의 공간 이미지들을 특유의 상상력으로 표현해온 작가의 30여년 작품세계를 크고 작은 대작 소품들로 망라해 보여준다. 특히 전시 동선의 말미인 2전시실 안쪽은 1991년 작가가 임종을 앞둔 할머니와의 대화를 바탕으로 당대 역사적인 유명 무명의 인물군상을 작가 자신의 모습과 한자리에 녹여 그린 <유적-토카타(질주)>(1991)로 마무리된다. 탱크로 비유되는 유근택 회화에서 작가가 사수가 되어 움직이는 탱크의 포신은 당연히 붓대다. 그 붓대에서 발산한 것은 시선이었다. 그의 눈길은 일상 풍경과 군상에 깃든 시대상과 이미지의 본질을 집요하게 탐구했다. 그 결실로 나온 작품들의 스펙트럼은 다기하고 깊어졌다. <한겨레> 연재소설 등에 삽화로도 발표하면서 1990년대 이후 꾸준히 작업한 그의 목판화들이 광주항쟁을 비롯한 근현대사 한국 민중의 저항을 조형적으로 승화시킨 것들이었다면, 한국 도시 곳곳 일상 풍경의 심층을 투시하면서 유령같이 희끄무레한 회색빛 톤의 화면에 모호한 필선으로 그린 작업들은 2000년대 이래 작가의 화풍을 특정하는 트레이드 마크처럼 자리 잡았다.

유근택 작가가 지난해 완성한 <폭포> 연작 중 일부분. 노형석 기자

그는 최근 수년간 숱한 국외 전시와 레지던시 작업을 거치면서 번지는 파도, 불타는 신문지, 샤워하는 사람 등을 소재 삼아 시간의 흐름을 마치 설치작품이나 조형물의 느낌으로 포착하는 작품들을 그리면서 더욱 진화하고 있다. 모더니즘 회화의 고전적 규범성을 벗어난 영국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의 근래 화풍과 비슷한 경지로 일정 부분 근접해가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21년 프랑스 노르망디에 레지던시 작업을 갔을 당시 코로나 감염이 확산되면서 고립되자 불안감을 달래기 위한 방편으로 신문지를 태우면서 포착한 소묘 그림 <어떤 풍경>이 단적인 사례다. 마치 비디오아트나 설치작업 해프닝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일상의 소식을 채운 신문지가 순식간에 사멸되는 그 순간을 되살려 내고 있다. 그것은 또한 시간성, 소멸과 죽음에 대한 자각이기도 한데, 바로 이런 시간의 폭력성에 대한 자각이 가장 안쪽에 있는 대작 <유적-토카타(질주)>(1991)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시간을 통시적으로 초월하며 배치된 인물 군상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자연광이 내리꽂히는 전시장 들머리 성큰가든의 창아래 흐릿한 폭포 연작들을 놓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중력을 거슬러 위로 솟구치는 물방울의 연속인 폭포 이미지를 놓은 것은 자연의 묵시적 질서인 중력과 시간성의 압박에 정면으로 맞서려는 의지의 표출로도 해석되며, 그것은 곧 태어나 죽고 사라지는 인간의 숙명에 대한 일종의 투쟁이자 저항으로도 해석된다.

도상학적으로 뜯어보면 유 작가의 희끄무레한 풍경과 인물 그림 곳곳에는 우리 일상 곳곳에 언제나 내재한 죽음의 그림자들이 비친다. 유령처럼 명확하지 않거나 당장 보이지 않는 기운 같은 것들을 불명확한 선과 색조로 일상의 사물과 건물, 사람들 뒤로 스멀스멀 드러내는 특유의 묘사 방식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산 것들의 삶을 낫을 휘두르듯 쓸어가 버리는 시간의 어찌할 수 없는 폭력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드러냄 자체를 통해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이야기한다.

조각거장 자코메티의 가늘고 왜소한 인체상을 떠올리게 하는 유근택 작가의 근작 <잔영>(2022)의 핵심 부분. 전시장 들머리 선큰가든에 <폭포> 연작들과 함께 내걸려있다. 노형석 기자

전시장 전체를 돌고 나면, 눈 밝은 관객들은 작가가 2차원 그림의 평면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욕구를 발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설치작품이나 해프닝처럼 절규하거나 몸부림치고, 독일 거장 안젤름 키퍼의 사물 페인팅처럼 화폭 밖으로 튀어나오고 싶어 한다는 것을. 2010년대 이후의 풍경 묘사 작업들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듯 작가는 이제 소묘 관찰 묘사의 단면을 넘어 몸과 감성이 튕기고 불꽃을 틔우는 표현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눈에 보이는 일상 풍경과 표현의 욕구, 사멸에 맞서는 인간적인 욕구를 어떻게 접목시키느냐를 집요하게 고민하고 있음을 전시는 드러낸다.

지난 30여년간 외연을 넓혀온 유근택 회화는 인간다움과 삶다움을 확인하려는 몸부림이자 투쟁의 소산이다. 하늘로 거꾸로 치솟아 역행하는 분수 물방울들의 순간순간을 화폭에 고정해 묘사한 것이나 분수대 물가에 자코메티의 왜소한 인체 상처럼 길쭉하게 비친 한 산책객의 투영된 상은 바로 작가가 내밀하게 역설하는 인간 본연의 생의 의지가 시간과 맞서며 남긴 자취라고 할 만하다. 그것은 바로 처절한 휴머니즘에 다름아니다.

작가는 전시 개막을 앞두고 근래의 작업 기록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나의 몸이 그림에 스며들고 그 몸이 도구화되어가는 어떤 반투명한 경계. 그것은 어쩌면 소멸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가련한 저항이 될 것이고 사라지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경의의 한 형식이 될 것이다...’

전시는 15일까지 열린다.

대구/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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