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지역 수학과 줄폐지, 차세대 지원 부족...이대로는 ‘제2 허준이’ 없다”
지방에서 수학과, 통계학과 사라져
학생 줄고 취업 어렵다는 생각 때문
AI·빅데이터 핵심인 산업수학이 대안
국가수학연구소 세우고 박사 지원도 늘릴 것
지난해 한국 수학계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국제수학연맹(IMU)이 한국을 회원국 최고등급인 5등급으로 올렸고,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수학과 교수 겸 고등과학원 수학부 석학교수가 한국인 최초로 ‘수학계 노벨상’인 필즈상을 받았다. 한국 수학자들은 이론 연구를 넘어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이나 기후변화까지 예측하고 금융, 산업 분야에서도 세계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올해 제27대 대한수학회장으로 취임한 박종일(60) 서울대 수리과학부 교수는 지난 6일 본지 인터뷰에서 “수학은 빅데이터(big data·대용량 정보), 인공지능(AI) 등 4차 산업혁명의 핵심으로 산업의 난제를 해결할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면서도 “지난해 한국 수학이 세계적으로 큰 결실을 거뒀지만, 이대로 가면 미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박종일 대한수학회장은 위상수학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낸 세계적인 수학자다. 위상수학은 도형과 공간의 성질을 다루는 학문이다. 박 회장은 우리가 사는 3차원의 공간에 시간이 더해진 시공간 같은 공간의 4차원 모양을 연구해 ‘인벤시오네 마테마티카(Inventiones Mathematicae)’ 등 세계적인 수학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했다. 박 회장은 1949년 이탈리아의 수학자 프란체스코 세베리가 제시한 기하학 난제인 ‘세베리의 추측’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다.
◇지방 수학교육 붕괴, 산업수학으로 극복
–왜 한국 수학의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생각하나.
“지역대학에서 수학과가 사라지고 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취학 연령의 인구가 줄었기 때문이지만, 수학과가 인기 없고 졸업해도 취직 문이 좁다는 인식도 한몫 하는 것 같다. 지역대학 수학과의 경쟁력을 키워 꾸준히 인재가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수도권 주요 대학에는 인재가 계속 들어오지 않나.
“기본적으로 수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많아야 산업계나 학계에 인재를 꾸준히 공급할 수 있다. 지역 대학의 수학과가 사라지면 인재를 키워낼 기회도 같이 줄어든다. 수도권의 대학이나 카이스트, 포항공대에서 키워낼 수 있는 인재들의 수는 한계가 있다. 지역대학 수학과 폐지는 지금 막 박사학위를 받은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수도권 주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더라도, 계속해서 교육하고 연구를 이어갈 교수 자리가 줄기 때문이다.”
–수학과 진학을 유도하려면 취업이 잘 돼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 다양한 산업 난제를 수학으로 해결하는 ‘산업 수학’이 활성화될 것이다. 빅데이터나 인공지능 등 4차 산업혁명의 핵심에서 가장 중요한 게 수학이다. 이 분야는 학부 수준의 수학을 제대로 공부해두면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수학과가 4차 산업혁명의 핵심 인력을 키워낼 수 있는 중요한 인큐베이터(incubator·보육기)라는 뜻이다.”
–수학과의 경쟁력은 어떻게 키울 수 있나.
“4차 산업혁명이나 의료, 기후 등과 관련된 산업 수학을 가르칠 수 있는 교육 과정을 만들 계획이다. 현재 일부 대학에서 교육 과정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가르치기도 하는데, 대한수학회에서 표준 교육 과정을 제공하려고 한다. 산업 수학 분야의 인재들이 사회로 나가 성과를 내면, 수학이 생각보다 널리 쓰인다는 인식이 생겨 이공계 기피도 해소할 수 있을 거라 본다.”
–그렇다고 수학과에서 산업수학만 가르칠 수는 없지 않나.
“응용수학과 이론수학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대학 1~2학년은 꼭 알아야 하는 기초수학을 배우고, 3~4학년은 이론 또는 응용수학 중 한쪽을 선택해 깊게 배우도록 할 예정이다.”
◇학문후속세대 연구 지원 부족, 수학연구소 추진할 것
–산업계에서 수학에 대한 수요가 높아 연구 지원도 활발할 것 같다.
“산업 난제를 수학적으로 해결하는 분야라 필요로 하는 곳이 많다. 그만큼 지원도 늘어 성과도 많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수학 전체에 대한 연구 지원은 아직 부족하다. 한국연구재단은 기초과학 연구 예산을 수학, 물리, 화학, 생명과학 등에 나눠준다. 다른 분야는 한국연구재단 외에도 다양한 기관에서 지원받을 수 있지만, 수학은 한국연구재단밖에 없다.”
–기초과학연구원(IBS)에도 수학 분야 연구단이 있지 않나.
“IBS에 있는 연구단 33개 중 수학 분야 연구단은 2+1개뿐이다. 수학 분야 연구자가 있는 연구단은 3개가 있는데, 둘은 단장이 수학자이다. 다른 하나는 단장 없이 젊은 연구자(CI)가 이끄는 4개의 세부 그룹만 있다. 이 중 계산과학 분야의 CI도 포함되어 있어 +1이라 했다. IBS에 물리, 생명과학, 화학 분야의 연구단은 각각 5개 이상인데, 수학은 2+1개다. 연구 예산은 수학 분야가 전체의 5%도 안 될 것이다.”
–청년 수학자를 지원하는 ‘허준이 연구소’, ‘허준이 펠로십’을 만든다는 소식이 있었다.
“허준이 교수의 필즈상 수상을 계기로 박사후 연구원을 지원하는 중장기 프로그램들이 생겨 기쁘다. 정확한 명칭은 모르겠으나, 고등과학원 산하에 있던 연구 센터를 확장해서 ‘허준이 연구소’를 만든다고 들었다. 그러나 한국 수학계의 전체 의견이 반영되지 않아 조금 아쉽다.”
(허준이 연구소와 허준이 펠로십은 미국 클레이 수학연구소를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허 교수는 아무런 조건도 없이 클레이재단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이 필즈상 수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허 교수는 지난해 7월 국내 기자간담회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클레이 펠로가 됐다. 5년 동안 아무런 결과도 조건도 없이 지원을 받았다. 주거와 월급을 책임져주는 이상적 환경에 있었다”고 밝혔다.)
–대한수학회 차원에서 연구를 지원할 계획이 있나.
“허준이 펠로십을 시작으로, 관련 부처와 협의해 학문 후속세대인 박사후 연구원을 안정적으로 지원하는 제도를 만들고 싶다. 매년 수학과나 통계학과 등 수학 관련 학과에서 배출하는 박사가 150명 정도다. 그중 수학과 출신 박사는 100명 이내인데, 연구소나 산업체에 자리 잡은 인원이 어림잡아 50명 정도다. 연구를 계속하고 싶다는 박사는 많지만, 지원 제도가 없어 시간제 강사나 학원 강사 등 다른 진로를 선택한다. 이렇게 박사학위를 받은 우수한 연구인력을 잃는 건 국가적으로도 굉장한 손해다.”
–국가수리과학연구소(수리연)나 고등과학원, IBS로 충분하다는 의견도 있다.
“정부 연구기관에는 연구할 수 있는 분야와 인원이 제한돼 있다. 수리연은 산업수학 중심이라 이론수학 전공의 박사가 갈 수 없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연구자 50명 이상이 3년에서 5년까지는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떠올린 것이 독립적인 정부 출연연구기관 성격의 ‘수학연구소’다. 국가 차원에서 설립해 지원한다면 한국 수학계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산은 IBS의 규모가 큰 연구단 하나에서 쓰는 정도면 충분하다. 그래야 제2, 제3의 허준이가 계속 나올 것이다”
◇수학에 대한 심리적 장벽 허물어야
–초·중·고에서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수학 성취도가 크게 떨어져 수학 교육을 강화하자는 의견이 높아졌다. 교과 과정도 늘었다.
“수학 교육 강화에 동의한다. 그러나 수학이 필수적인 인공지능, 빅데이터 분야 인재를 키우자고 하면서 꼭 필요한 수학을 가르치지 않고 있다. 지난 40~50년 동안 수학 교육 과정은 조금씩 내용이 줄었다. 사교육을 줄이기 위해, 또는 수포자(수학포기자)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지금 사교육이나 수포자가 줄었나. 오히려 늘었다. 교육 내용을 줄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교과 과정이 늘면서 학생들은 어렵다고 하고 교사들은 가르칠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교육의 본질을 생각해야 한다. 교육은 새로운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이다. 과정이 즐겁지 않아서, 어려워서 피하려고 하면 안 된다. 도형이나 함수, 방정식은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계단식으로 배운다. 하지만 행렬은 고교 수학부터 갑자기 등장한다. 그러니 어렵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행렬은 인공지능에 필수적인 개념이다. 어렵다고 해서 빼는 건 안 된다.”
–학생들이 수학에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없나.
“지난 3년 동안 코로나19 때문에 멈췄던 프로그램들이 많다. 네이버와 함께 수학 영상물을 제작하는 행사나 대중강연, 멘토링 등이다. 수도권보다는 수학 문화를 접하기 어려운 지역 위주로 수학 문화 프로그램을 진행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수학의 재미를 찾는 학생들에게 조언한다면.
“입시 수학은 많은 문제를 기계처럼 빠르게 푸는 데 집중돼 있다. 하지만 수학이라는 학문은 달리기 하는 것처럼 주어진 시간 내에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게 아니다. 수학의 본질은 깊게 논리적으로 사고해 새로운 방법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지금 상황에선 어렵겠지만,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어 수학 문제 하나를 두고, 오래 고민하고 풀어보며 진짜 수학의 재미를 느껴보길 바란다.”
◇부실 학술지, 학계의 자정 노력 필요
–부실 학술지 논란이 수학계에서 시작했다.
“부실 학술지는 논문 심사 과정이 터무니없이 짧고 지나치게 이윤만 추구한다. 일부 부실 학술지는 같은 학술지에 실린 논문을 서로 인용하도록 유도해 인용횟수를 늘린다. 그렇게 해서 학술지를 평가하는 기준인 ‘임팩트 팩터(Impact factor, 피인용지수)’를 4~5 이상으로 만든다. 반면 수학 분야의 최상위 학술지들은 임팩트 팩터가 3 내외다. 다른 분야에 비해 논문을 쓰고 인용할 연구자 수가 적기 때문이다. 부실 학술지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부실 학술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2021년 대한수학회 회장 명의로 회원들에게 ‘부실 가능성이 있는 학술지에는 될 수 있으면 투고를 하지 말라’고 이메일을 보냈고,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에서도 부실 학술지 목록을 만들어 공개하면서 조금 잠잠해졌다. 그러나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당장 승진이 필요하거나 연구비가 필요한 연구자에게는 달콤한 유혹이다. 그래도 수학계 전반적으로 부실 학술지에 논문을 싣지 말자는 분위기가 퍼져있고, 학술지에 싣더라도 금방 소문나거나 경력에 영향이 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정작용이 이뤄지고 있다고 판단한다.”
–자정 노력 외에 제도적 보완책은 없나.
“연구비 지원 기관과 대학에서도 평가 제도를 손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로 논문 수나 임팩트 팩터를 보는 정량적인 평가가 중요했지만, 선진국처럼 학계에 있는 동료들이 서로를 평가하는 ‘피어리뷰(peer review, 동료 평가)’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그리고 문제가 있다고 해서 제도나 정책을 자주 바꾸고 규제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잘못한 사람에게는 연구 지원을 줄이거나 과제를 신청할 때 벌점을 주는 것은 좋으나, 문제를 아예 없애기 위해 이것저것 바꾸는 것은 되려 성실한 연구자의 의욕을 낮출 것이다.”
☞박종일 대한수학회장
1986년 서울대 수학과 학사
1996년 미국 미시간 주립대 수학과 박사
1996년 미국 어바인 캘리포니아대 수학과 방문조교수
1997년 건국대 수학과 조교수, 부교수
2004년~ 서울대 수리과학부 부교수, 교수
2010년 청암과학상
2010년 하이데라바드 세계수학자대회(ICM 2014) 초청강연자
2011년 한국과학상
2012년 미국수학회 초대석학회원
2013년 대한민국최고과학기술인상
2015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
2020년 대한수학회 학술상
- Copyright ⓒ 조선비즈 & Chosun.com -
Copyright © 조선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무비자에 급 높인 주한대사, 정상회담까지… 한국에 공들이는 中, 속내는
- 역대급 모금에도 수백억 원 빚… 선거 후폭풍 직면한 해리스
- 금투세 폐지시킨 개미들... “이번엔 민주당 지지해야겠다”는 이유는
- ‘머스크 시대’ 올 것 알았나… 스페이스X에 4000억 베팅한 박현주 선구안
- 4만전자 코 앞인데... “지금이라도 트럼프 리스크 있는 종목 피하라”
- 국산 배터리 심은 벤츠 전기차, 아파트 주차장서 불에 타
- [단독] 신세계, 95年 역사 본점 손본다... 식당가 대대적 리뉴얼
- [그린벨트 해제後]② 베드타운 넘어 자족기능 갖출 수 있을까... 기업유치·교통 등 난제 수두룩
- 홍콩 부동산 침체 가속화?… 호화 주택 내던지는 부자들
- 계열사가 “불매 운동하자”… 성과급에 분열된 현대차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