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채용하고 급여 주는 MZ 소설가…'가녀장의 시대' 열다
"페미니즘 소설로만 읽히면 아쉬워…가족 드라마다"
(서울=뉴스1) 이승환 손승환 기자 = 소설가 슬아는 촉망받는 젊은 작가이자 출판사 대표다. 그는 쉰다섯 살의 복희와 웅이를 출판사 직원으로 두고 있다. 복희는 슬아의 모친이며 웅이는 부친이다. 슬아가 지시하면 모친과 부친은 분주하게 일을 수행한다. 복희와 웅이는 그 대가로 슬아에게서 급여를 받는다. 가끔 슬아는 속상하거나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웅이와 담배를 피운다.
소설 '가녀장의 시대' 줄거리다. 소설에서나 있을 법한 얘기가 아니다. 작품 속 주인공과 이름이 같은 저자 이슬아 작가(31)는 실제로 출판사(헤엄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현실에서도 그의 부모가 헤엄출판사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책을 든 독자라면 어디까지 실화이며 창작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최근 서울시 종로구 창성동 카페에서 만난 이 작가는 "엄밀히 비율을 따지긴 어렵지만 절반은 허구이고 절반은 실제 있었던 일"이라며 "직원이자 가족인 부친과 담배를 피우는 것이 저희 집에선 자연스러운 일인데 독자들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고 말했다.
◇가부장 잇는 '가녀장'…"그래도 할아버지 존중" 'MZ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글발 끝내주는 천재' '페미니스트 소설가' 등 각종 수식어가 이 작가에게 따라붙는다. 지난해 9월30일 '가녀장의 시대'’ 초판 출간 후 주요 매체들이 잇달아 그와 인터뷰했다.
누드모델과 잡지사 기자, 웹툰 작가로 활동한 이력은 그를 향한 독자의 관심을 증폭시켰다. 이 작가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글쓰기 수업도 하고 있다. 당차거나 도발적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이 작가는 신중하고 현실적인 모습이었다. 그것은 소설 '가녀장의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가녀장의 시대'를 읽기 전과 후 느낌이 다릅니다. 읽기 전엔 기존 질서를 뒤집는 전복적인 소설로 예상했어요. 그러나 슬아는 '휘하에 열한 식구를 둔' 가부장 할아버지를 닮은 인물로 묘사되지요. 가부장제를 완전히 부정했다면 그런 식으로 인물을 설정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저 한 사람이 어떻게 가부장제를 부술 수 있겠어요. 슬아는 가부장인 할아버지로부터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동시에 물려받았지요. 할아버지는 지나간 시대의 낡은 남성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슬아가 너무나 사랑하는 존재인 거죠. 할아버지는 슬아에게 권위와 낡은 관습뿐 아니라 세계를 표현하는 언어나 예절도 물려줬을 거예요. 슬아는 할아버지의 영향 아래 있을 수밖에 없지요. 이 때문에 할아버지의 존재가 없었다는 듯이 소설을 구성하고 싶지 않았어요."
-할아버지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고민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가부장제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억압했을 수 있거든요. 할아버지도 가부장제 안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했을 수 있고요. 이런저런 피해도 봤을 수 있겠죠. 그래서 할아버지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선에서 손녀가 가장인 '가녀장의 시대'라는 새 시대를 열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소설 속에서 완전히 가부장제를 버릴 순 없었어요."
이 작가는 '가녀장의 시대' 첫 페이지에 이렇게 썼다. '지나간 시대의 어른들과 새 시대의 동료들을 복잡하게 사랑하며 이 드라마를 바친다'.
또 이 소설 첫 번째 챕터 '태초에 가부장에 있었다'에는 다음 대목이 있다. "집과 계단과 방과 식탁과 텔레비전과 화분 등은 모두 가부장의 것이었다. 그는 손녀(슬아)에게 가르쳤다. 절은 어떻게 하는 건지, 자축인묘 진사오미신유술해가 각각 어떤 동물을 의미하는지, 고기는 어떻게 삶아야 하는지……"
-억압적인 가부장제를 비판하면서도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을 감싸 안는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낡은 관습을 모두 전복시키는 이야기도 필요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제가 잘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두 전복하려 했다면 마음에 걸리는 얼굴이 속속 떠올랐을 거예요. 그 사람들도 사정이 있었을 텐데 마음에 계속 걸리는 거지요. 가녀장의 시대보다 용감하고 전투적인 이야기가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뒤에서 무언가를 챙기는 이야기도 필요해요. 제 소설이 그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설 뿐 아니라 수필에서도 할아버지 얘기가 나옵니다. 실제 상인이었던 할아버지에게 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상인의 감각'을 물려받은 덕분인지 출판사도 잘 운영하고 있지요(헤엄출판사는 주요 언론사로부터 '내년이 기대되는 출판사'로 선정된 바 있다).
"저는 대가족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어요. 아들이 많은 집의 유일한 딸이었죠. 계속 성별을 실감했던 것 같아요. 여자로 태어나는 건 무엇일까, 성별은 랜덤이나 운으로 결정되는 건데 삶의 모습이 많이 바뀌는 구나……그런 생각을 해왔죠. 그러면서 남성 식구들이 밉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떻게 밉기만 하겠어요?"
-그래서 '복잡하게' 사랑한다고 쓰셨나요.
“'복잡하게' 자라면서 할아버지를 많이 생각했어요. 제가 '일간 이슬아'를 하잖아요. '일간 이슬아' 같은 종류의 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저희 집에서 할아버지와 저 두 사람밖에 없어요.
매일매일 운동하고 매일매일 비슷한 루틴(방식)으로 살아가지만 그것을 지겨워하지 않고 가세를 일으키는 것은 저나 할아버지 모두 너무 좋아하지요. 저희 두 사람은 식구들의 생계를 혼자 책임지는 걸 좋아하는 기질입니다."
◇"전업 작가로 살 수 있을 정도로 번다"
'일간 이슬아'는 한 달에 20차례 독자의 이메일로 에세이를 보내주는 메일링 서비스다. 에세이 한 편당 가격은 500원이다. '일간 이슬아'는 2018년 2월 이 작가가 학자금 대출금 2500만원을 갚기 위해 시작한 일이다.
당시 출판사나 홈페이지 등 중간 플랫폼을 거치지 않고 독자와 '직거래'하는 서비스라 과연 성공할까 의문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일간 이슬아'는 대성공해 이 작가를 스타덤에 올렸다.
이 작가는 수입을 묻는 질문에 "책이 잘 팔릴 때 혹은 한창 연재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는 수입이 다를 수밖에 없다"면서도 "전업 작가로 살 수 있는 정도는 번다"고 말했다. 그는 마침내 부모를 직원으로 채용하며 '가녀장'이 됐다.
-소설 주요 인물 웅이와 복희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친인 웅이는 출판사 비정규직이며 청소와 운전, 배달, 택배 발송 등을 합니다. 반면 정규직인 복희는 집안일을 주력으로 하지요. 그런데 복희의 월급은 웅이 월급의 두 배이고요. 이렇게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흔히 바깥일을 부엌일보다 더 주체적으로 보잖아요. 그러나 전업주부, 그러니까 부엌일 하는 여성에게도 어마어마한 주체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부엌에서 독립하지 못한 여성이 문제가 아니라 부엌일이 충분히 존중받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 본 거죠."
-부엌일을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지요.
"모든 여성이 부엌에만 있으면 안 되겠죠. 많은 여성이 부엌일에서 해방되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요. 그러나 복희처럼 음식에 너무 큰 재능이 있다면 어떨까요? 살림이 적성인 사람에게는 부엌의 영광을 돌려주면 어떻겠느냐고 생각했죠.
부엌에서 해방시키는 이야기도 필요하지만 부엌일을 하는 사람에게 경외심을 담아 금전적 보상을 하는 이야기도 필요합니다. 소설에선 복희의 부엌일에 명예를 부여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어요."
-예상과 달리 웅이는 가부장과 거리가 먼 인물입니다.
"캐릭터가 좀 특이한 분이죠. 슬이보다 웅이가 더 흔치 않은 캐릭터일 거예요. 왜냐하면 그는 가녀장제에 물 흐르듯이 흡수된 상태니까요. 그것은 그가 과거 소심한 문학청년이었던 것과 관련 있어요. 소위 '센 남자'가 아니라서 남성 무리 중 우두머리가 될 수 없는 존재였죠. 그런데 어린 시절 저는 그런 남자 아이들한테 마음이 갔어요. 남자 사회에서 살아남는 것이 남성들한테 쉽지 않은 일이라고 느꼈죠."
-차 안에서 웅이와 맞담배를 피우는 장면도 나옵니다. 슬아가 상의 안에 속옷을 입지 않은 채 생방송 패널로 출연했다가 "다음 주부터 안와도 된다"는 해고 통보를 받고 침체된 마음으로 귀가하는 길이었습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소설 내용 중 어디까지가 실화고 창작일까 궁금했습니다.
"비율을 엄밀하게 따지긴 어려울 것 같아요. 다만 사례별로 실제 있었던 일인지 아닐지 나눌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아버지와 맞담배를 피우는 것이 저희 집에서 있는 일이고 저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죠. 그래서 소설에 썼는데 독자 분은 그 대목을 읽고 충격을 받으셨던 것 같아요."
-방송국의 반대에도 상의 안에 속옷을 탈의한 채 출연한 것은 실제 있었던 일인지요.
"그것은 픽션이에요. 다만 상의 안에 속옷을 탈의한 채 방송국을 갈 때마다 "속옷을 착용해야 한다"는 피드백을 받았지요. 그러나 그것에 정면으로 싸워본 적은 없지요. 저만 가만히 있으면 일이 모두 순조롭게 진행되니까요. 단체로 하는 일을 망치기가 어려우니까요.
방송사의 요청대로 하고 조용히 넘어갔죠. 문제는 그렇게 하면 아무것도 안 바뀐다는 점이죠. 연예인들의 상의 속옷 착용 유무를 놓고 여전히 바보 같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요. 그야말로 구시대적인 현상인데 누군가는 싸워야 조금이라도 바뀌지 않겠습니까. 소설에선 한 번 시원하게 부딪히자는 마음으로 그렇게 싸우는 사례를 창작한 것이지요."
-'가녀장의 시대'는 페미니즘 소설인가요.
"그렇게 읽힐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런 평가만 받는다면 좀 아쉬워요. 저희 아버지와 할아버지, 제 남자친구들도 다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굳이 어떤 종류의 소설로 비치길 원하지 않아요. 그냥 하나의 가족 드라마로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MZ세대는 MZ세대 얘기 하지 않는다"
이 작가는 '일간 이슬아 수필집'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심신 단련' '부지런한 사랑' '아무튼 노래' 등 에세이집과 '깨끗한 존경' '새 마음으로' '창작과 농담' 등 인터뷰집을 냈다. 서평집으로는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 서간집으로는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공저) 등을 썼다.
-슬아는 소설에서 '대중 작가를 지향한다'고 하지요. 실제로도 그런지요.
"아무리 의미 있고 올바른 것이라도 안 읽히면 의미가 없지요. 그래서 독자가 제 글을 끝까지 읽을 수 있게 만들자며 글을 써요. 그러려면 글에 군더더기가 없어야 해요. 책을 내면 여전히 수정할 게 많지만 문장을 '경제적'으로 쓰려고 노력합니다. 초고부터 (군더더기가 없도록) 타이트하게 쓰는 편입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MZ세대 대표 작가'라는 평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스스로 MZ세대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요.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요. MZ세대는 사실 MZ세대를 잘 얘기하지 않잖아요? MZ세대는 이 세대를 규정해야 하는 사람들의 욕망이 드러난 호칭인 것 같아요. 여러 언론이 MZ세대 담론을 다루지만 한 번도 제 얘기나 친구들 얘기 같다고 느낀 적 없습니다."
mrle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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