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선정 '미래 유니콘'도 역차별 규제에 발목... 미국 이전 고심

이현주 2023. 1. 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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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 명문대 학생에게 영어 배우는 '링글'
성인 영어 서비스를 초중고로 확대 추진
"외국인 강사는 대졸이어야" 규제 벽 부딪쳐
"K에듀테크 정체성 갖고 성장하고 싶다"
이성파(왼쪽) 이승훈 링글 공동대표가 지난해 4월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정부에서 'K유니콘'이 되라는 꿈을 심어줬는데, 정작 성장을 하려고 하니 역차별 규제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습니다."

비대면 영어회화 교습 서비스 '링글'의 이성파(35) 공동대표는 최근 한국일보와 만나 "올해 미국으로 본사를 옮겨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이 대표는 2015년 이승훈(41) 공동대표와 함께 하버드대, 예일대 등 미국 명문대 재학생들이 비대면으로 영어를 가르치는 링글을 창업했다. 지난해 5월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선정하는 글로벌 정보통신기술 미래 유니콘(기업가치 1조 원이 넘는 비상장기업)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사업이 순항했다.

그랬던 링글은 뜻밖의 '암초'를 만나 계획에도 없던 본사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 정부가 성장을 지원하는 스타트업이 어쩌다 '플립'(Flip·외국에 본사를 두고 한국 본사를 지사로 바꾸는 것)까지 고민하게 됐을까.

링글이 규제의 벽에 부딪친 것은 성인 대상 서비스를 초중고생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면서였다. 링글은 3년 정도 이 사업을 야심 차게 기획했지만, 학원의 설립·운영 및 과외교습에 관한 법률(학원법) 시행령 조항에 발목이 잡혔다.

현행 학원법 시행령은 초중고생에게 외국어를 교습하는 외국인은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링글은 1,300여 명의 강사를 두고 있는데, 강사의 70%가량이 하버드대(110명), 예일대(55명), 케임브리지대(48명) 등 미국·영국의 상위 30위권 학교 재학생이다. 전문 강사들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고급 영어를 구사하는 현지 대학생들에게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점이 링글의 차별화 전략이다.

그런데 현재 성인을 대상(평생교육)으로 하는 링글이 10대 학생들을 대상(학교교과 교습)으로 서비스를 확대하면, 기존 강사들은 학원법 시행령 때문에 '무자격 강사'가 되는 셈이다. 링글 관계자는 "비수도권 지방자치단체나 학생 수가 적은 초등학교 등에서 링글을 공교육에 도입하겠다는 문의가 오고 있지만, 현행 법령 안에서는 서비스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외국인 강사 학력 규제 쟁점. 김대훈 기자

링글 경영진은 이 규제를 개선하기 위해 약 8개월간 여러 정부 및 대한상공회의소 규제혁신전담기관의 문을 두드렸다. 세계 대학 평가에서 상위권에 드는 대학의 경우 재학생의 교습도 예외적으로 허용해 달라는 요청이다. 그러나 소관부처인 교육부는 두 차례에 걸쳐 규제 개선 요청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교육부는 △자격 미달로 인한 부실교육 방지 △내국인 강사 일자리 보호 등을 반대 이유로 내세우고 있다.

이성파 링글 공동대표가 6일 서울 서초구 링글 본사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이현주 기자

링글은 이 규제가 한국 업체만을 향한 역차별이라고도 주장한다. 미국, 일본 등 업체들은 이미 대학생을 강사로 채용해 국내 초·중·고생 및 미취학 아동을 상대로 비대면 영어 회화 교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링글 관계자는 "비슷한 외국 업체들이 한국어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한국에 연락사무소를 두고 영업을 한다"면서 "국내 기업도 한국 시장에 서비스할 수 있도록 정부가 글로벌 스탠더드(국제 표준)에 따른 규제를 적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중반까지만 해도 제도 개선의 희망이 보이기도 했다. 여러 차례 규제 개선을 건의한 끝에 지난해 8월 민간전문가 등이 규제 적정성을 심의하는 국무조정실 규제심판부의 7개 심판과제 중 하나로 선정됐다. 여론 수렴 차원에서 대국민 토론도 실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규제 개선 과제였던 대형마트 영업제한 완화 안건이 논란을 일으키면서 링글에 대한 토론까지 연기됐고, 교육부는 지난해 11월 링글 측에 또 한 번 규제 개선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못 박았다.

링글의 학원법 규제 개선 건의 일지. 김대훈 기자

링글 측은 움직이지 않는 정부를 언제까지 바라만 보고 있을 순 없다는 입장이다. 이 대표는 "해외 업체들은 아무 제재를 받지 않은 채 자유롭게 서비스를 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이대로 규제 개선을 기다리다가는 우리가 쌓은 선점 효과를 잃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해외로 본사를 옮기는 방안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이 대표는 가급적 한국에 기반을 두고 서비스를 확장하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그는 "한국에서 자동차, 가전, 반도체 등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도 큰 기업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한국에서 K에듀테크 기업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성장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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