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부치지 않은 편지
“서 시인, 자네나 나나 국민학교(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낮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엔 야간학교 다녔지. 열네 살, 그때부터 지금까지 식구들 먹여 살리느라 부지런히 살아온 죄밖에 없잖은가. 그런데 갑자기 내 몸에 무서운 암이 자라고 있다는 의사 선생 말을 듣고는 온몸에 힘이 빠져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네.”
새해 아침, 마치 삶을 다 내려놓은 듯 힘없는 자네 전화를 받고는 앞이 어질어질했다네. 아픔과 절망으로 가득 찬 자네를 떠올리며 이 글을 쓴다네.
자네는 도시에서, 나는 산골에서 이날까지 빠듯한 살림살이에 자식 뒷바라지하느라 오직 일밖에 모르고 살았지. 특기와 취미생활이 모두‘일’뿐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말일세. 그러니 몸속에 병이 자라는 줄 어찌 알았겠느냐고.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58년 개띠 해에 태어난 우리는, 제대로 숨 쉴 틈도 없이 바쁘게 살아왔잖은가. 그러니 낭만과 여유는 우리 몫이 아니었지.
병이란 잘못된 생활습관 때문에 오는 거라고 쉽게 말하지만, 사람한테 찾아온 병을 어찌 생활습관 탓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병이란 고단한 삶의 훈장 같기도 하고, 있는 힘을 다해 살아온 영광스러운 상처라고도 하지 않던가. 그러니 자네 잘못만은 아니라네. 함께 풀어가야 할 숙제일세.
긴 노동 시간과 불안한 일자리, 끝없는 경쟁과 성과주의에 내몰린 지친 영혼들. 어질고 정직하게 살아갈수록 더 가난해지는 비열한 현실, 아무리 부지런히 일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미래. 혼자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미세먼지 나쁨 때론 매우 나쁨, 갈수록 심해지는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 이런 현실 속에서 안 아픈 게 이상한 거잖아. 누구나 아프게 되는 거잖아. 우리 몸이 쇳덩어리가 아니니까 말일세.
그러니까 숨기지 말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게나. 그래야 함께 돌볼 수 있지. 그래야 함께 희망을 찾을 수 있지. 그리고 과거든 현재든 그 무엇이든 걱정거리 잠시 내려놓고 쉬엄쉬엄 숲속을 걸어보게. 걷다가 지치면 나무 그늘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새소리 바람소리 들어보게. 무거운 짐이 조금 가벼워지리라 생각하네. 병이 다 나으면 더없이 좋겠지만, 병이 다 나아야만 행복한 건 아니지 않은가. 병이 없어도 불행한 사람이 하도 많은 세상이니까 말일세.
남한테 휘둘리지 않는 길은, 자기 몸은 자기가 스스로 돌보는 데서 열린다고 하더군. 틈을 내어 <내 몸이 최고의 의사다> <통증보감> <스스로 몸을 돌보다>와 같은 책을 읽어 보시게. 자네나 나나 먹고사느라 바빠 ‘나’를 지킬 책 한 권 마음 다잡고 읽은 적이 없지 않은가? 오랜 친구로서 내가 자네한테 할 수 있는 게 이런 말밖에 없다니, 정말 미안하네. 아무튼 아픈 것도 서러운데 마치 죄인처럼 기죽고 살지는 말게.
새해부터는 아픈 몸이 다른 사람한테 짐이 되지 않으면 좋겠네. 아이든 어른이든 넉넉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누구나 걱정 없이 치료받을 수 있으면 좋겠네. 때가 되면 정든 사람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면 좋겠네. 우리 함께 그 길을 찾아 보세나. 혼자 꿈을 꾸면 꿈으로 그치지만, 함께 꿈을 꾸면 그 꿈이 현실이 되지 않겠는가.
서정홍 농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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