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소리] 가장 평범한 책임
지난 연말에는 출판사 사무실이 텅 비었다. 직원들이 밀린 연차를 사용하기 위해 다들 긴 휴가 일정을 잡아서였다. 이직한 지 3개월 째라 쌓인 연차가 없던 나는 자연스럽게 일주일간 혼자 사무실을 지키게 됐다. 빼놓으면 안 되는 연락이나, 자잘하게 챙겨야 할 업무는 담당자에게 미리 인수인계 받았다. 잊지 않으려 하나씩 포스트잇에 적다 보니 한쪽 벽면에 일주일 치의 할 일이 빼곡히 붙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호언장담했지만, 막상 혼자가 되니 예상치 못한 일들이 연이어 터지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작업 공정 하나가 누락됐다고 연락이 오고, 저기서는 다른 회사 제품을 잘못 보내주고, 또 한쪽에서는 갑작스레 판매량이 올라간 책의 증쇄 작업 요청까지 들어왔다. 안 그래도 자신의 업무가 아니라 바짝 긴장하고 있던 나는 완전히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왜 하필 지금 이러느냐는 억울한 마음이 몰려왔지만, 어쨌든 혼자 해결해볼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경우는 휴가 중인 담당자에게 전화라도 해야지 싶었다. 우선 확인해야 할 목록을 다시 한번 정리한 후 거래처에 차례로 연락을 취했다. 익숙하지 않거나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사내 매뉴얼과 수첩, 모니터 밑에 밀어둔 메모라도 찾아서 뒤적거렸다.
처음엔 막막해 보이던 일들이었지만, 하나씩 해결하다 보니 조금씩 정리가 됐다. 마지막 사안에 대한 결재 파일까지 올리니 그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다행히 휴가 중인 담당자에게 전화로 사정해야 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벽면에 붙어있는 일주일 치의 책임은 가벼운 마음과 함께 그곳에서 내려올 수 있을 터였다.
사실 내가 맡은 업무가 그리 중대하고 대단한 업무였을 리는 없다. 기껏해야 담당자가 마무리해둔 작업을 확인하고 몇 가지를 거래처에 더 요청하는 정도였다. 최악의 경우가 생겨도 일정이 조금 늦어지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 사소한 업무들을 무사히 마쳤기에, 직원분들이 즐겁게 휴가를 마치고 마음 편히 새해 첫 출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지키고 싶어 하는 것들도 그다지 특별하거나 대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길게 보내는 연말 휴가나, 친구들과 떠나는 여행이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뜻깊은 추억을 지킬 수 있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삶 전체로 보면 아주 짧을 수 있는 그런 시간을 위해 우리는 새해에도 바삐 일터로 나와 정신없고 막막한 업무들을 헤쳐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다들 평범한 책임을 다하며, 평범한 일상을 지켜나간다. 때로는 나뿐만이 아니라 나와 연결되어 있는 다른 누군가의 일상도 함께 말이다.
하지만 평범할지언정, 무언가를 책임진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건 예상치 못한 사건사고에 억울하기도 하고, 가끔은 치명적인 실수에 눈앞이 새하얘지는 경험이다. 실제로 우리는 책임을 다하지 않고 피하는 사람을 자주 본다. 단순히 비겁하고 유약한 사람뿐만 아니다. 힘 있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도 자신은 모른다며, 내가 할 일이 아니라며, 이미 벌어진 일이라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쉽게 뱉는다.
그 텅 빈 말들은 결국 우리 사회가 떠받쳐야 했을 159명의 ‘가장 평범한 삶’을 무너지게 했다. 어디에도 연결되지 못한 채 좁은 골목에서 고립되게 했다. 참사 이후 70일이 넘게 지났지만 그들의 벽에 빼곡해야 할 책임은 온데간데없다. 엄연히 존재하는 매뉴얼과 남아있는 기록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나를 가장 분노하게 만드는 건, 공공의 책임이 무너진 폐허 속에서도 절대 손상되지 않는 ‘평범하지 않은 삶’을 긍정하려는 움직임이다.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하는 이들은, 마치 공중에 떠 있는 성처럼 우리 사회가 지금껏 지켜왔던 보편적 합의와 상식에서마저 벗어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위험과 아픔은 폐기물 취급을 당하며 ‘평범한 삶’으로 쏟아진다.
우리가 밝혀야 하는 진실도, 싸워야 하는 대상도, 최종적으로는 그 지점을 행해야 한다고 느낀다. 모든 기준과 상식을 초월하려는 기이한 움직임을 다시 ‘사회’와 ‘공공’의 영역으로 회복하려는 노력 말이다. 그때까지 내 마음의 포스트잇은 떼지 않으려 한다. 가장 평범한 책임을 내려놓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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