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 영어 실력이 세계 62위로 추락한 까닭

베이징/이벌찬 특파원 2023. 1. 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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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벌찬의 차이나 온 에어]
당국, 2021년부터 영어교육 규제
중국 원창시의 한 초등학교에서 지난 2019년 진행한 영어 공개 수업./메이폔

“초등학교 영어 수업이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중국 상하이에 있는 외국계 기업 직원인 장모(38)씨는 지난 2일 “중국 학교는 더 이상 학생들의 영어 실력을 키워주지 않는다”고 했다. 초등학교 2학년인 그의 조카가 다니는 학교는 1~2년 사이 영어 수업을 주 4회에서 2회로 줄였다. 다른 지역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지린성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교육 당국 방침에 따라 초등학교 6학년 영어 수업을 지난해부터 주 6회에서 4회로 줄였다”면서 “학습 진도는 바뀌지 않아 수업의 질만 낮아졌다”고 했다.

중국에서 영어 교육이 빠르게 축소되면서 중국 학생들의 영어 실력이 급락하고 있다. 최근 글로벌 교육기관 EF 에듀케이션 퍼스트가 전 세계 112개 비영어권 국가를 대상으로 평가한 ‘2022년 영어능력지수’에서 중국은 62위에 그쳐 2020년(38위), 2021년(49위)에 비해 순위가 급락했다. 한국은 36위였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이번 평가에서 중국은 어린 나이일수록 영어 실력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중국은 지난 2021년 7월 숙제와 사교육 등 학생을 짓누르는 2개의 부담을 줄이겠다는 내용의 ‘솽젠’(雙減·쌍감) 정책을 발표했다. 그 결과 초·중학교 학생들은 법정 휴일, 주말, 방학에는 학원을 다닐 수 없고 평일에도 학습 시간이 제한됐다. 이 정책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분야는 영어 사교육이었다. 지난해 2월에는 대형 영어 학원들이 고등학생 대상 과정도 대폭 줄였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 당국이 공교육에서 영어 비중을 낮추기 시작했다. 2021년 8월에는 상하이 교육 당국이 지역 내 초등학교 3~5학년의 영어 월말·중간·기말고사를 폐지했고, 후난·지린·허난 등도 영어 교육 축소 정책을 잇달아 발표했다. 지난해 9월 중국 교육부는 “초중고교 외국어(영어) 수업 시간 비율은 전체 교과목 중 6∼8%에 불과해 중국어(20∼22%), 수학(13∼15%), 예체능(10∼11%) 등에 비해 현저히 낮다”고 밝혔다.

1990년대 중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영어 학습 프로그램 '펑쾅잉위'. 당시 수많은 학생들과 성인들이 펑쾅잉위 서적과 영상, 테이프로 영어 공부를 했다./웨이보

중국의 영어 교육 축소는 미·중 대립이 심화하는 가운데 서구 사상과 이념의 확산을 막기 위한 조치란 분석이 나온다. 중국은 1978년 개혁·개방 정책을 시행한 이후 외부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 영어 교육을 강조해왔다. 1990년대에는 ‘펑쾅잉위’(Crazy English)라는 이름의 영어 테이프·비디오가 전국에 영어 열풍을 불러왔고, 2008년 베이징 하계 올림픽을 앞두고는 택시 운전사들을 대상으로 단체 영어 교육을 실시했다. 2010년대에는 중국 고등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대외 활동이 영어로 진행하는 ‘모의 유엔’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국제 영향력이 커지고, 미·중 경쟁이 심화되면서 중국 정부가 서구 문화권의 정서를 담고 있는 영어를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중국 미디어 업계 관계자는 “중국 정부는 더 이상 영어를 외부 세계와 소통하는 도구로 보지 않는다”면서 “지금 중국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선 중국어를 세계 공용어로 만드는 노력이 진행 중”이라고 했다. 미디어 정책을 맡고 있는 중국 신문출판방송총국은 지난해 연예계에서 외국어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베이징과 톈진 등 대도시의 공공장소 영어 표기는 병음(拼音·알파벳을 이용한 중국어 발음 표기)으로 바뀌고 있다.

소셜미디어 등에선 영어가 중국 부유층의 전유물이 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영어 교사를 가사 도우미로 채용해 진행하는 비밀 과외나 캠프 형식으로 진행되는 영어 교육 등은 기존 학원에 비해 비용이 5~10배 높다. 베이징의 한 30대 여성은 “부유한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영어 유치원, 영어·불어를 쓰는 국제학교에 보내는 경우가 일반적”이라며 “학교에서 영어 교육을 축소할수록 중국인들의 영어 실력은 재산과 사회적 지위에 비례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영어 잘하는 학생들이 ‘왕훙(網紅·인플루언서)’에 오르는 사례가 오히려 늘고 있다. 영어 실력이 해외 유학·외국계 기업 취업 등과 직결되는 상황에서 영어 능통자에 대한 청년층의 부러움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 교육에 더욱 힘써야 한다는 목소리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한 유명 웨이보(중국판 트위터) 계정은 “중국의 바링허우(80년대 출생자)들은 누구나 영어에 푹 빠져서 살았던 경험이 있고, 그것이 이들의 경쟁력이 됐다”면서 “세계 대부분의 정보가 영어로 돼 있는데 영어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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