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윤석열 대통령은 ‘과격한 이명박’인가
새해가 밝았지만 들리는 것이라곤 온통 우울한 소식뿐이다. 경제 여건은 더 나빠질 가능성이 크고, 남북관계는 한층 험악해질 것이라고 한다. 코로나19는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가장 심란한 것은 나라가 이명박(MB) 정부 때로 퇴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더 안 좋은 판본으로.
얼마 전 북한 무인기 여러 대가 영공을 침범해 서울 상공을 휘젓고 다녔다. 일부는 용산 대통령실 인근 상공에 설정된 비행금지구역(P-73) 안까지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이를 두고 윤석열 대통령은 “수년간 군의 태세가 부족했음을 보여준 사건”이라며 전 정권 탓부터 했다. MB 정부 때인 2010년 11월23일 연평도 포격사건이 터지자 당시 여권이 전 정권의 햇볕정책을 탓한 것과 똑같은 행태다. 그래도 그때는 야당 의원에게 ‘적과 내통’ 운운하지는 않았다.
지난해 말 윤석열 정부는 신년 특별사면을 통해 전직 대통령 이명박씨와 국정농단 사범들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김진모 전 검사장, 최윤수 전 국정원 2차장처럼 윤 대통령이나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가까운 검사 출신도 여럿 포함됐다. 김태효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1차장도 사면 대상에 넣어 ‘셀프 사면’이라는 말이 나왔다. 잔칫상이 얼마나 질펀했던지 ‘사면농단’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거기에 야권 인사 몇 명을 끼워넣고는 “국민통합과 나라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겠다”고 했다. 국정농단 사범들에게 면죄부를 주면서는 “이들이 직무·직책상 관행에 따라 범행에 이르렀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국정원 댓글사건 수사팀장 때인 2013년 10월 조영곤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에게 국정원 직원들에 대한 체포 및 압수수색을 설득하면서 “3·15부정선거와 같은 사태”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관행에 따른 범죄’라며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을 감싼 것이다. 이 모습을 보고 이명박씨가 퇴임을 한 달 앞둔 2013년 1월 최시중·천신일·박희태 등 측근과 사돈인 조현준 효성 사장을 사면한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씨는 “재임 중 발생한 권력형 비리에 대한 사면은 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이번 사면도 그 원칙에 입각해서 실시했다”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지금 이 정권에서 벌어지는 일 대부분이 그런 식이다. ‘윤석열차’ 소동은 쥐그림 그라피티 소동의 새 버전이고, 경제정책은 7·4·7 정책의, 남북정책은 비핵·개방 3000 구상의 패러디 같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이른바 노동 개혁이다. 윤 대통령은 화물노동자들이 좀 더 안전하게 일하며 먹고살게 해달라고 파업에 나선 것을 두고 “북한의 핵 위협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화물연대 파업을 제압해 지지율이 조금 오르자 노동 개혁을 최고 국정과제로 격상시켰다. 특수부 검사 출신답게 노조의 회계투명성 문제를 의제로 띄우더니, 급기야 여당에선 최저임금위원회 등 임금·복지·산업재해 관련 합의기구에서 민주노총을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노조 악마화’ ‘노조 때리기’가 여권의 스포츠가 된 것은 처음이 아니다. MB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떼법 청산론’을 들고나왔다. 그때 정부가 내놓은 것이 지금 여권에서 나오는 ‘무관용 원칙’ 등이다.
이 정부가 MB 정부 때로 퇴행하는 건 MB 정부 출신 인사가 대통령실 등에 다수 포진한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정책의 싱크로율이 이 정도라면 그들이 현 정부의 정책을 주무른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추론이다. 정치 경험은 일천하나 스트롱맨 지향성은 강한 대통령, 정치적·철학적 중심은 약하지만 자기애는 강한 대통령, 정책은 잘 모르지만 행동은 거침없는 대통령이야말로 이들이 복화술을 하기에 최적의 조건일지 모른다. 북한의 도발에 ‘확전 불사’ ‘우월한 전쟁 준비’와 같은 말로 대응하는 것을 보라. 윤 대통령을 ‘과격한 이명박’이라고 하면 과장일까.
현실이 부조리한데 말조차 통하지 않을 때 사람은 절망한다. 그래서 지난해 말 작고한 소설가 조세희의 난장이는 굴뚝에 올라갔고, 지금 장애인들은 지하로 내려간다. MB 정부가 떼법 근절을 말한 뒤 용산참사가 있었고, 쌍용차 사태가 있었고, 국정원의 노조와해 공작이 있었다. 마르크스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헤겔의 말을 인용하면서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번은 소극으로’라고 덧붙였다. 이 정부의 종국이 비극일지 소극일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사회구성원 전체가 그 결과의 공동 채무자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정제혁 사회부장 jhj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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