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문해력 붕괴, 기성세대는 책임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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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필요한 어휘로 권위 세우고 세대 간 소통 실패한 탓은 아닌가
“지구력이 부족하다고? 지구력 자체가 지구이기 때문에 만들어진 말 아닌가요.” 얼마 전 한 웹 소설의 댓글 하나가 관심을 끌었다. 외계 행성이 무대인 이 소설에서 한 등장인물이 왜 ‘지구력’이란 말을 썼느냐는 독자의 항의였다. ‘오래 버티며 견디는 힘’이란 뜻의 지구력(持久力)을 ‘지구의 힘’인 ‘지구력(地球力)’ 쯤으로 착각한 것이다. 이 댓글에는 “그럼 달에서 만들어졌음 달력인가요”란 댓글이 달렸다.
‘심심(甚深)한 사과’를 ‘지루한 사과’인 줄로 알거나, 대통령에게 ‘호가호위(狐假虎威)하지 말라’고 했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사람들은 통탄한다. 젊은 세대의 문해력이 상상을 벗어날 정도로 떨어지고 있다는 걱정인 것이다. 한자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은 탓이라는 지적이 있는데, 분명 일리가 있지만 ‘사흘’을 ‘4일’로 아는 데 이르면 좀 더 포괄적인 문제가 있다.
요즘 힘을 얻고 있는 것은, 어릴 때부터 지나치게 동영상과 스마트폰을 가까이한 탓에 문해력과 독서 능력이 망가졌다는 진단이다. 최근 출간된 책 ‘난독의 시대’(박세당·박세호)에선 대략 2010년 이후 출현한 디지털 기기 탓에 후천성 독서 장애가 일어나고 있다고 본다. 난독(難讀)을 극복하려면 모든 단어와 눈을 마주치면서 뜻을 새겨 자세히 읽는 정독(精讀) 습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 사안이 과연 일방적으로 청년들을 훈계하기에 좋은 ‘꼰대질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 부모와 자식 사이 대화가 원활한 집에서 자라고, 교사와 학생 사이 문답이 활발한 학교에서 공부한 학생이라면 ‘고지식하다’를 ‘지식이 높다’는 것으로 알고 ‘연패(連敗)’와 ‘연패(連覇)’를 혼동할 가능성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한 아이돌 가수의 조부모가 한꺼번에 별세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조부모’가 오른 적이 있었다. 무슨 뜻인지 몰랐던 것이다. 당시 필자도 이런 현상이 안타깝다는 기사를 썼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 인터넷으로 그 뜻을 검색해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예전엔 각자 사전을 뒤적여 찾아봤더라도 기록으로 남지 않았을 뿐이다.
기성세대는 어린 시절 국민교육헌장에 ‘안으로 자주독립(自主獨立)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人類共榮)에 이바지할 때다’라는 말이 나와도 대부분 감히 질문하지 못하고 그저 외우기만 했다. 그런 것도 모르느냐는 꾸지람을 들을까 주눅이 들어서 그랬다. 그래도 같은 말이 교과서에 반복해서 나오면 나중엔 대충 무슨 뜻인지 알고 넘어갔다.
인터넷이 대중화된 지 한 세대가 지난 지금, 젊은 세대는 그런 일이 있으면 곧바로 손을 들어 항변하기를 꺼리지 않는다. 처음엔 한심했지만 자꾸 읽을수록 ‘가르쳐주지도 않고 탓만 하느냐’는 절규 같아 안타까워지는 인터넷상의 짧은 글이 있다. ‘금일(今日)’을 금요일로 잘못 알고 과제 기한을 놓친 한 학생의 토로다. “학생을 평가하는 위치에 있으시면서 오해 소지가 있는 단어를 사용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저 말고도 금요일이라 이해하신 분들 분명 있을 텐데. 제 말이 틀렸나요?”
‘오늘’ 대신 ‘금일’이라 쓰고, ‘사이를 벌린다’고 해도 될 것을 굳이 ‘이격(離隔)한다’고 표기하며, ‘점심식사’ 대신 ‘중식(中食)’이라 써서 ‘중국식 식사’라는 오해를 일으키는 것은 모두 소통을 어렵게 만드는 불필요한 권위의 잔재가 아닐까. 결국 자기 세대까지만 아는 말을 쓰며 헛기침을 하는 기성세대, 그리고 책보다 유튜브와 훨씬 친숙하게 자란 결과 출판물에 적힌 단어를 모르게 된 젊은 세대 사이에 놓인 장벽이 언어의 불통(不通)이란 현상으로 드러나게 된 셈이다. 어쩌면 앞으로 펼쳐질 더 거대한 단절의 징후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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