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의 어떤 시] [103] 허망에 관하여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2023. 1. 9.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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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열

열쇠꾸러미를 너에게 준다

어느 방 어느 서랍이나 금고도

원하거든 열거라

그러하고 무엇이나 가져도 된다

(…) 이 세상에선

누군가 주는 이 있고

누군가 받는 이도 있다

받아선 내버리거나

서서히 시들게도 하는

이런 일 허망이라 한다

허망은(…)사람의 식량이다

나는 너를

허망의 짝으로 선택했다

너를 사랑한다

-김남조(1927~)

(원시와 다르게 행을 배열함)

최영미의 어떤 시 / 허망에 관하여

에스프레소 커피처럼 진하고 열정적인 시어들. “내 마음을 열 열쇠꾸러미를 너에게 준다”는 첫 행을 읽고 나는 무장해제되었다. 어느 날 그가 왔다. 그에게 내 마음을 다 보여줄 수는 없다. 살아온 날이 얼마인데, 하나씩 차례로 열어야지. 이 서랍에는 유년의 뭉게구름, 저 서랍에는 청춘의 분홍 장미… 깊이 숨겨둔 금고에는 무엇이 있을까? 무엇이든 다 열고 가져도 된다니. 가슴에 서랍을 달고 있는 여인, 살바도르 달리의 조각 ‘비너스’가 생각났다.

내 마음을 두드리는 그에게 열쇠를 넘겨주고 시인은 허망(虛妄)을 말한다. 어이없고 허무한 일. “받아선 내버리”는 몹쓸 짓을 나도 했다. 나를 도우려는 사람에게 가혹하게 대한 적도 있다. 누군가에게 허망을 안겨주고 내가 무사하길 바라는가. 허망(虛妄)도 슬픔도 인간의 양식이다. 그만 자책하고 가슴들아 쉬자.

허망에 관하여 (원시)

내 마음을 열

열쇠꾸러미를 너에게 준다

어느 방 어느 서랍이나 금고도

원하거든 열거라

그러하고

무엇이나 가져도 된다

가진 후 빈 그릇에

허공부스러기 쯤 담아 두려거든

그렇게 하여라

이 세상에선

누군가 주는 이 있고

누군가 받는 이도 있다

받아선 내버리거나

서서히 시들게도 하는

이런 일 허망이라 한다

허망은 삶의 예삿일이며

이를테면 사람의 식량이다

나는 너를

허망의 짝으로 선택했다

너를

사랑한다

-김남조(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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