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이트] "살아 남아도 아프다"‥10.29 참사 생존자들 여전한 트라우마

최경재 2023. 1. 8.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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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재현 군 / 10.29 참사 당시 생존자 (지난달 13일)] "나 엄마 아빠..진짜 진짜 진짜 진짜 진짜 많이 사랑해. 나 안 울려고 했는데..다음 생에도 엄마가 내 엄마 돼줘. 아빠가 내 아빠가 돼 주고...

그 날 이태원에서 빠져나왔던 고등학교 1학년생 이재현 군.

하지만, 살아 남았다고 살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꼬박 한 달반을 힘겹게 버티다, 끝내 먼 길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MBC 뉴스데스크 (지난달 14일)] "정말 이런 일만은 생기지 않길 바랐는데요. 10.29 참사 생존자였던 10대 고등학생이 어젯밤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이 군은, 어째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으로 내몰렸을까요.

마지막 순간을 스스로 찍은 동영상에서, 그는, '친구들을 따라 간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어이 없이 떠나보내기엔 믿어지지 않는 단짝들이었습니다.

'왜 그 때 거기서 아무 것도 못했을까'.

뒤늦은 후회는 무력감으로 커졌고, '살아 남았다'는 안도감마저 곧 죄책감으로 바뀌었습니다.

기적의 생존자였던 이재현 군은 이제 159번째 공식 희생자로 기록됐습니다.

해가 바뀌었지만, 참사는 진행 중입니다.

피붙이를 잃은 유가족들은 물론이고, 생존자들에게도 언제 끝날 지 모를 고통의 시간들입니다.

집에서 자상하고 정이 넘쳤던 이 군은 해마다 가족의 생일 케이크를 챙겼습니다.

학교에선 친구들과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는 게 좋았습니다.

그날 밤 이태원에선, 가장 친한 친구 두 명과 함께였습니다.

귀갓길 지하철역으로 가다 인파에 휩쓸렸고, 의식을 잃기 직전 가까스로 구조됐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고 이재현 군 어머니] "뒤에 있는 친구는 손도 까딱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고 앞에 있는 친구 같은 경우에는 그 친구가 의식을 잃어가는 과정을 이 아이(재현이)는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거예요."

근육 세포가 파열될 정도로 다치고도 "친구들 장례식장을 가야 한다"며 이틀 만에 병상을 뛰쳐나왔습니다.

[고 이재현 군 어머니] “친구들이 너무 보고 싶다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이제는 없다는 거예요. 힘든 일 있거나 그랬을 때는 의견을, 항상 상담을 구하는 그런 존재였던 것 같아요.”

애써 떨쳐내려 할 때마다, 악몽은 기어이 되살아났습니다.

[고 이재현 군 어머니] “말수 자체도 너무 줄어들었고 잠도 잘 잘 수 없었고 버스를 못 타겠는 거예요. 막혀 있는, 그 사람이 이렇게 부딪치는 그런 공간 때문에 그럴 때 ‘숨이 답답하고 불안하고 힘들다’라는 표현을 저한테 여러 번 했었고 자전거를 타고 간다고 하더라고요.”

일상을 되찾으려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참사 일주일 만에 다시 학교에 나갔고, 헬스장에서 땀을 흘려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답장을 보내올 리 없는 친구들에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카톡을 보냈습니다.

[고 이재현 군 어머니] “초반에는 "나 잘 살아 볼게"라는 그런 말들이었어요. 근데 어느 시점이 지나가면서부터는 "네가 너무 보고 싶다" 이런 내용이 있었고..”

뻥 뚫린 가슴에선 그리움에 사무친 노랫말이 흘러나왔습니다.

[故 이재현 군] "물끄러미 너를 들여다 보곤 해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결국 참사 45일만인 지난달 13일.

'학교에 간다'며 집을 나선 이 군은 집 근처 숙박업소에서, 열 여섯 짧은 생의 마지막 밤을 맞았습니다.

휴대전화에는 부모님과 동생에게 남긴 21분짜리 영상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스트레이트>는 이 군의 어머니에게서 건네 받은 이 영상을, 고민 끝에 목소리만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故 이재현 군] "나 솔직히 ○ ○ 이랑 □ □ 가 너무 보고 싶어. 상담사 쌤이 그러더라고. 충분히 슬퍼하고 충분히 울라"고 "그래야 마음이 더 나아진다"고 했는데 난 정말 충분히 슬퍼하고 충분히 엄마 아빠 없을 때도 많이 울었는데.."

또다른 생이별을 예감하며, 남겨질 친구들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故 이재현 군] "내가 힘들 때 되게 많이 위로를 해주고 많이 도움도 줬던 친구라서 내가 되게 친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친구들이니까 좋은 말들 많이 해줘. 알겠지?"

'정말 좋은 엄마 아빠를 만나 축복이었다', '그래서 더 죄송하다'고 말했습니다.

[故 이재현 군] "엄마 아빠랑 동생도 항상 매일 항상 진짜 항상 지켜보가 있으니까 내가 만날 지켜본다고 생각하고 잘 살아줘야돼. 알았지..나 말했어 동생도 공부 열심히 하고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되고 무조건 너는 서울 안에 있는 대학교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 사랑해."

32살 홍두성 씨는 참사 현장에 함께 있던 쌍둥이 형을 잃었습니다.

생존자인 동시에, 유족이 된 겁니다.

"고향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사자"고 같이 나섰던 길이었습니다.

[홍두성 / 10·29 참사 생존자] “제가 숨쉬기 힘들어서 호흡을 이렇게 가늘게 쉬고 있었는데 형님이 제 이름을 두 번 크게 부르더라고요. 일단은 목소리 들어보고 하니까 '괜찮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홍 씨는 누군가의 손을 붙잡고 수렁을 벗어났지만, 저만치 떨어진 형은 그대로 의식을 잃은 채 쓰러졌습니다.

[홍두성 / 10·29 참사 생존자] “형님이 저를 불렀을 때 제가 대답이라도 했으면 형님도 저처럼 힘내고 어떻게 버텼을까 싶기도 하고 둘이 갔는데 혼자만 나와서 만약에 그 일을 막을 수는 없더라도…”

같은 날 태어나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심지어 군대까지 동반 입대했던 형이었습니다.

[홍두성 / 10·29 참사 생존자] “잠도 매일 같이 자고 침대도 한 침대에 그냥 같이 썼어요. 맨날 집에서 자기 전에 큰일이 있든지 작은 일이 있든지 얘기하고 했는데 아침에 깨면 형님이 없어서 어디 갔나 싶어서 '전화나 해봐야겠다' 하다가 다시 또 사실을 깨닫고…”

작가 김초롱 씨도 이태원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생존자입니다.

[김초롱 / 10·29 참사 생존자] “앞뒤로 압박이 심해서 공중에 발이 뜨지 않는 느낌은 ‘숨이 안 쉬어진다’라는 단순히 그런 느낌보다는 헐떡헐떡거리는 느낌? 그리고 ‘오래 지속되면 안 될 것 같은데’라는 느낌이었고.”

숨막히던 골목길에서 가게 상인들이 문을 열어줘 가까스로 참극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김초롱 / 10·29 참사 생존자] "잠을 못 자는 게 기본이고요. 이명이 심해졌어요. 그리고 소리에 민감해졌어요.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거의 안 되는 수준이고요."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흐릿했던 순간, 살아남았다는 게 '고통'일 줄은 몰랐습니다.

[김초롱 / 10·29 참사 생존자] “참사로 돌아가신 분들의 죽음을 진짜로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왜냐하면 정말 한 발자국 차이였기 때문에. 그러니까 너무 고통스러운 거죠. 그런 데서 오는 죄책과 자책이 나를 너무 괴롭혔고 제 자신이 스스로 좀 징그러운 인간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살아있어도 되는가. 살았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뚜렷한 외상이 없더라도, 참사를 겪은'트라우마'는 지우기 힘든 상처입니다.

10·29 참사 직후 윤석열 대통령은 유가족과 생존자, 목격자들에게까지 세심한 심리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작년 10월 30일 대국민 담화)] "관계 공무원을 [일대일로 매칭]시켜서 필요한 조치와 지원에 빈틈없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두 달여가 지나갔는데요,

생존자들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참사 직후 나온 정부의 '심리 지원 지침'.

청소년에겐 캐묻는 듯한 느낌을 주지 않도록 유의하고 배려하는 태도를 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재현 군이 입원하자마자 병실을 찾아온 건 경찰이었습니다.

아무런 예고 없이 시작된 사고 조사.

친구를 잃어 망연자실한 상태에서, 떠밀리듯 참혹했던 현장을 떠올려야 했습니다.

[고 이재현 군 어머니] “사고 당시 얘기들 자세하게 물어봤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힘들었다'고… 저희 상황은 고려가 되지 않고 아이한테 자꾸 이것저것 캐묻는 것 같고.”

다음날엔 보건복지부 관계자들이었습니다.

[고 이재현 군 어머니] “전날 경찰서에서 찾아온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30분은 넘지 않아야 한다고 얘기를 하고 그러던 차였거든요. 저희가 병실을 비우게 되니까 그새 가셨더라고요.”

이후 한 대학병원에서 재현 군이 받은 심리평가 결과서.

"주요 핵심 정서는 우울감과 죄책감, 무력감으로 파악된다"

"극단적 선택 시도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주의가 필요하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고 이재현 군 어머니] “안 그래도 힘든 아이를 더 힘들게 하는 것 같고 ‘자책감이나 이런 것이 더 깊어지는 데에 역할을 했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은 들어요. 면담하겠다고 하는 것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거였어요.”

설마했던 재현 군의 비극이 알려지자, 한덕수 국무총리는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듯한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한덕수 국무총리 (지난달 15일)] “생각이 좀 더 굳건하고 치료를 받겠다, 좀 이런 생각들이 더 강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 총리 말대로, 치료를 받으려 하면 문제가 없었던 걸까요.

정부가 지원한다는 심리 상담.

기관이 바뀔 때마다, 지우고 싶었던 기억을 꺼내놓아야 했다고 합니다.

[홍두성 / 10·29 참사 생존자] “제가 서울에서 받고 안동에 또 가니까 또 처음부터 다시 얘기를 해야 하고 또 병원에 가니까 또 병원에서 또 처음부터 다시 얘기를 해야 하고 그런 것들이 있었어요.”

여기저기서 전화는 와도 거기서 거기였습니다.

[고 이재현 군 어머니] “어떤 스탠스로 이 아이를 돌봐야 되는지 이거에 대한 도움을 받고 싶었거든요. '깊은 사랑과 애정으로 아이한테 관심을 가져라' 이런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상투적인 내용이었거든요. 중구난방 전화가 오는 그런 상담 홍보 전화의 일종으로 저는 느껴졌어요.”

현재 정부의 심리 치료를 주도한다는 복지부 산하 국가트라우마센터.

서울 본부를 비롯해 강원·영남·호남·충청에 지역센터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신건강의학 전문의는 서울에만 상주하고 있습니다.

다른 지역센터에선 약 처방도 못 받는 겁니다.

[최윤경 / 계명대 심리학과 교수 (지난달 1일, 국회 정책 토론회)] “정신건강 임상심리사들이 고용되어 있다가 (처우가 열악해서) 이제는 다 나가서 제로 상태입니다. 심리치료를 수행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이 부족합니다. 재난을 전문화해서 지원할 수 있는 그런 기관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이처럼 도움의 손길은 미약한 반면, 혐오와 조롱은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국민일보의 분석에 따르면, 10.29 참사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 중 58%에 혐오 표현이 담겨 있었습니다.

다른 기사보다 월등히 높은 비율입니다.

10·29 참사 희생자들의 영정이 놓인 서울 녹사평역.

바로 맞은 편엔 보수단체가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연대 관계자 (지난달 21일, 페이스북 '김상진 TV')] "또 우는 소리, 아이고 이제 취재진들이 오늘 많아서 취재진들이 많으니까 각본대로 울음 소리좀 내야 할 것 같죠."

이런 장면, 처음 보는 게 아닌 듯한데요.

9년 전,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진상을 규명해달라"며 목숨을 걸고 단식농성 하던 바로 옆.

극우단체들이 치킨과 피자를 가져와 먹는 이른바 '폭식투쟁'으로 유족들을 조롱했습니다.

[참석자 (지난 2014년 9월)] "여기서 먹으면 안 돼요? 왜 안 돼? 왜 안 돼?.

당시 일부 정치권은 또 어땠습니까.

[주호영/당시 새누리당 정책위의장(2014년 7월)] "저희들 기본 입장은 이것이(세월호 참사가) 기본적으로 사고다. 교통사고다."

지금도 비슷합니다.

[김상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 "참사 영업상의 새로운 무대가 되는 건 아닌지 참으로 우려스럽습니다."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맞닥뜨려야 하는 절망적인 현실.

친구 수백 명을 먼저 보낸 세월호 생존자들도 "달라진 게 없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박모 씨(가명) / 세월호 참사 생존자] “제가 자주 얘기를 들었던 것 같은 건 정치적으로 이용당한다고 해야 할까요. 또 그런 이야기 '시체 팔이 한다' 그런 걸 보면 달라진 거는 크게 없다고…"

어느덧 9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악몽은 불시에 뇌리를 파고 듭니다.

[김모 씨(가명) / 세월호 참사 생존자] “가만히 있다가도 막 천장이 갑자기 무너져 내릴 것 같고 어디 건물에 갈 때도 출입구부터 우선 잘 살펴보고 무슨 일이 일어날까봐..."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이 가장 무섭습니다.

[박모 씨(가명) / 세월호 참사 생존자] "무의식적으로 계속 나를 다른 사람들이랑 분리하고 있더라고요. 가끔 택시를 탈 때 기사님들이 ‘혹시 단원고 학생이냐?’ 그렇게 물으면 가슴이 철렁할 때가 있었고.”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했던 세월호 생존자들.

참사 5년이 지나서야 그들만의 쉴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쉼표'.

정부나 지자체가 아니라, 시민 사회의 후원으로 세워졌습니다.

[김모 씨(가명) / 세월호 참사 생존자] “얘기하기도 편하고 좋은 것 같아요. 크리스마스쯤에 같이 모여서 파티했던 기억이 남네요. 저는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있으면 좀 더 나은, 서로에게 나은 영향을 준다고 믿거든요.”

특별한 프로그램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생존자들끼리 음식을 만들어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됐습니다.

[라은영 / '쉼표' 운영자] "우리 친구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어떨 때는 노출이 되는 거예요. 아이들이 어디 가서 분식집에 가서 밥 뭐 분식 하나도 먹을 수가 없어요. 친구들이 여기서 뭘 하든지 간에 안전하고 안정되게 있다가 갔으면 좋겠다."

2001년 9.11 테러를 겪은 미국은 참사 현장에 추모 공간을 만들고, 22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당시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막아주지 못한 피해는 국가의 책임.

그게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김초롱 / 10·29 참사 생존자] "그들이 계속 진정성 있는 사과를 원하는 건 살고 싶어서이기 때문일 거예요.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어서. 일상으로 돌아오려면 누군가가 책임을 지고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변화하겠습니다'라는 약속을 해야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를 다시 믿고 '그래 그럼 우리 다시 돌아가서 열심히 살아보자' 이런 마음이 들 거 아니에요. 제발 ‘살아남아 있는 자들이 원하는 게 따로 있다’라는 식으로 몰고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잘 살고 싶어서, 살아내고 싶어서 애쓰시는 거거든요."

최경재 기자(economy@mbc.co.kr)

기사 원문 - https://imnews.imbc.com/replay/straight/6443657_2899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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