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윤석열은 없지만 한약업사 김장하에게는 있는 것

한겨레 2023. 1. 8.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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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말고]

<엠비씨(MBC)경남>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의 김장하 선생. <엠비씨경남> 제공

[서울 말고] 권영란 | 진주 <지역쓰담> 대표

“나라가 해야 할 일을 이 어른이 평생 해오셨네.”

감탄이든 추임새든 한마디씩은 쏟아냈다. 새해 만나는 사람마다 한 어른의 일대기가 큰 얘깃거리였다. 세밑 진주를 비롯한 경남 일대 온오프라인으로 이어지던 이 파장은 1월1일 아침 마침내 정점을 찍었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가 나왔고, 또 같은 시기 ‘아름다운 부자 김장하 취재기’라는 부제를 단 단행본 <줬으면 그만이지>가 세상에 나왔다. 덕분에 뭉클한 마음으로 새해 첫 아침을 맞을 수 있었다.

뭔 설레발을 이리 칠까 싶겠지만, 부디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시길. 지난해 5월31일 경남 진주 시내 낡고 오래된 한약방 ‘남성당’ 주인이 은퇴와 함께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구 35만명 도시 전체가 술렁이는 듯했다. 미리 소식을 접한 시민들이 마지막으로 약을 짓겠다며, 인사를 올리겠다며 찾아와 남성당은 여러 날 문전성시를 이뤘다. 시골 한약방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소년이 한약업사 자격증을 취득해 스무살에 한약방을 열었고 그뒤 지역에서 60여년 해온 일들…. 더러는 ‘도시를 개혁한 어른’이라고 했다.

수십년간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그의 행적을 좇은 ‘어른 김장하’는 <엠비씨(MBC)경남>과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기자가 공동작업해 1부는 세밑 끝날, 2부는 새해 첫날 편성됐다. 아쉽게도 경남지역에만 방송됐다. 김장하(79)는 20대에 장학사업을 시작해 40살에 사학재단을 설립하고 48살에는 학교를 국가에 헌납했다. 또 “권력이 무서워해야 할 하나는 있어야 한다”며 지역언론(옛 <진주신문>) 운영비와 오갈 데 없는 여성을 위한 피난시설을 만드는 비용을 대는 등 문화예술, 출판학술, 환경, 노동 등 지역사회 구석구석에서 기꺼이 ‘물주’로 나섰다. 평생 인터뷰 한번 하지 않았던 그 바탕에는 “줬으면 그만이지. 아픈 사람으로 벌어들인 돈이니까 병든 사회를 고치는 데 썼지”가 있었다.

새해 첫날 텔레비전에서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가 끝나고 바로 대통령 신년사가 이어졌다. 검찰공화국인 윤 정부에서는 언론도 종교도 진보인사도 모두 입을 닫았다. 대통령은 타인의 결핍과 상처에 공감능력 제로라는 진기를 펼쳤고, 정치는 국민 삶으로부터 멀어졌다. 역시나, 집권 8개월차 대통령의 첫 신년사는 전근대적이다 싶을 정도로 고루했다. 지금의 경제위기는 수출로 돌파하고 미래전략기술로 경쟁력을 높이고 노동, 교육, 연금 등 3대 개혁을 하겠다고 했다. 개혁이 이토록 허황하게 들릴 수 있던가. 무엇보다 “자유는 우리에게 더 많은 기회를 연대는 우리에게 더 큰 미래를 선사할 것” 운운하는 대목에서는 되레 자유, 기회, 연대가 뭔가 생각하게 했다.

올해는 백정들의 신분해방과 인권을 주창한 ‘형평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김장하는 백촌 강상호를 떠올리게 한다. 백촌은 양반이었으나 백정 신분해방에 나섰고 만석지기였으나 죽을 때 묻힐 땅 한평 갖지 않았다. 당시 형평사 창립 때 선포된 주지문 첫 머리에는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이라’고 밝혀놓았다. 되짚어보면 지난 세월 형평운동은 한약업사 김장하에게로 이어지고 있었다. 김장하는 ‘새로운 차별’에 맞서 수많은 사람을 키워냈고 골고루 건강한 지역사회 건설을 위해 구석구석 씨앗을 심고 물을 길러왔다. 없는 이에게 기회를 줬고 소외된 곳과 아낌없이 연대했다. ‘김장하식’ 차별철폐였고 권력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럼에도 여든을 앞둔 어른은 그저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한다”고 한마디 던질 뿐.

김장하의 공평과 연대,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언급한 자유와 연대. 감동과 냉소만큼 간극이 크다. 왜일까? ‘대통령 윤석열’은 없지만 ‘한약업사 김장하’에게는 있는 그 무엇 때문이리라.

<엠비씨(MBC)경남>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 <엠비씨경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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