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 같은 사람, 화석 같은 언어

한겨레 2023. 1. 8.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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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2월27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23 산업통상자원부·중소벤처기업부 업무보고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김공회 | 경상국립대 경제학부 교수

윤석열 대통령은 화석 같다. 그 화석은 70년대 말이나 80년대 초 어디쯤에서 굳어졌다.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나 말투, 사람을 대하는 스타일 등이 모두 그런 느낌을 준다. 그런데 그는 1960년생으로 지금 64살이지만, 70년대엔 대체로 어린 학생이었다. 그래서일까.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노라면, 가슴에 손수건을 단 반공소년 하나가 수백명의 동급생이 도열해 있는 국민학교 운동장의 구령대에 서서 열정적인 몸짓과 함께 뜻도 모르는 채 주입된 단어들을 토해내고 있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화석 같은 사람은 화석 같은 언어를 쓴다. 화석어에는 지금은 안 쓰는 사어가 포함된다. 윤 대통령이 새삼 부활시킨 자유민주주의나 시장경제 같은 게 그렇다. 이들은 그 반대편에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사회주의 경제 같은 것들이 있었을 땐 의미가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윤 대통령의 말이 화석어인 것은, 그가 언어와 개념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존중하지 않는 것 같아서이기도 하다. 그가 좋아하는 ‘자유’를 보자. 서양에서 벼려진 이 개념의 복잡한 내용까지 갈 것도 없이, 한국에서만 봐도 냉전시대의 자유와 1980년 광주 이후의 자유, 그리고 1990년대 ‘신자유주의’ 이후의 자유가 어찌 같겠는가?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라고 노래하던 이가 훗날 ‘건물주의 자유’를 누릴 때, 두 자유의 색깔도 다를 수밖에 없다.

저 화석인이 존경해 마지않는다는 밀턴 프리드먼도 비슷하게 볼 수 있다. 한때 자유의 전도사를 자처했고 지구촌을 누비며 지면과 브라운관을 가리지 않았던, 가히 ‘사상가’의 반열에 올랐던 그이지만, 신자유주의의 ‘민낯’이 만천하에 드러난 지금 대체 어떤 공직자가 그를 그런 이유로 존경한다고 공언하는가? 외려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프리드먼은 화폐경제학의 선구자이자 1930년대 대공황의 이론가로서 더 높게 대접받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윤 대통령이 화석처럼 보이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자유와 프리드먼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이들이 그에겐 냉전시대의 그것으로 굳어져 있는 것 같아서다. 그의 개념에는 역사가 없고 사회가 없다.

최근 윤 대통령은 또다시 새로운 화석을 꺼내 들고 말잔치를 벌였다. 지난 12월27일 산업통상자원부와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2023년도 산업·기업 정책 방향’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그는 두 부처가 기업 지원에 더욱 매진할 것을 주문하며 ‘국가가 소멸해도 시장은 유지된다’라는 명언을 남긴 것이다.

이 발언에 깃든 ‘국가 대 시장’ 구도도 사회과학에서 꽤 오래된 논제이지만, 요즘엔 여기에 매력을 느끼는 연구자는 많지 않다. 특히 1970년대 말 이후 체제경쟁에서 자본주의가 승기를 잡고 세계화가 본격화하면서 ‘국가냐 시장이냐’를 둘러싼 논쟁이 불을 뿜었다. 시장론자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전세계를 장악함에 따라 세계는 하나의 시장과 같이 되고 나라 간의 경계는 무의미해질 것이라며 감격했었다. 이에 맞서 반대쪽에선, 세계화란 결국 ‘자본의 세계화’일 뿐이고 대다수 민중의 삶은 영토에 종속될 수밖에 없으며, 자본주의의 승리는 무분별한 착취나 불평등 같은 자본주의의 폐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짐을 의미할 것이므로 과거 어느 때보다도 국가의 역할이 필요해질 거라고 주장했다.

이후 역사가 어느 쪽 손을 들어줬는지는 우리 모두 안다. 외려 현실은 과거의 세계화 회의론자들이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국가에 요구하고 있다. 오늘 국가는 자본주의의 부작용을 사후적으로 교정하는 역할뿐 아니라 2007년 이후엔 자본주의 자체의 구원자로 등장하고 있는 형국이니 말이다.

‘국가가 소멸해도 시장은 유지된다’는 발언은 자본의 국적성에 관한 해묵은 논란을 새삼 상기시켜주기도 한다. ‘국가냐 시장이냐’라는 시대착오적인 문제를 던져놓고 윤 대통령이 한 것 가운데 하나가 삼성 등 반도체 대기업을 위한 이례적으로 과감한 세제 지원이다. 그런데 그의 논리대로라면, ‘우리 국가’라는 개념보다 더 취약한 게 ‘우리 기업’이다. 국가가 사라졌는데, 내가 애플보다 삼성에 더 애착을 가져야 할 이유가 뭔가? 그래도 1997년 경제위기에선 외국 자본에 먹힐 위기에 놓인 재벌들이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며 우리 공통의 국적성을 강조하기라도 했었다. 대체 저 구령대 위의 화석인은 뭘 하겠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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