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을 동력 삼은 행정

박수지 2023. 1. 8.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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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회원들이 지난 2일 오전 서울 지하철 4호선 삼각지역 승강장에서 지하철 탑승을 시도하는 가운데 경찰이 배치돼 있다. 연합뉴스

[한겨레 프리즘] 박수지 | 이슈팀장

출근 자체가 고된 노동이다. 폭설이라도 내려 출근이 힘들어지거나 지하철 고장으로 지각하는 것만큼 직장인에게 짜증나는 일도 없다. 만 2년을 넘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선전전은 그래서 출근길 시민들로부터 ‘갖은 욕’을 먹었다. 그 어떤 시민사회운동가도 시민들한테 손가락질받으면서 권리운동 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욕먹는 선전전’을 2년 넘게 끌고 온 것은 앞서 다른 갖은 방법을 써봤지만 “욕을 먹어도 이렇게 해야 정부가 이야기를 들어주기 시작했다”는 게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 설명이다.

시계를 돌려 22년 전인 2001년 2월6일. 장애인 단체 활동가들이 서울지하철 1호선 서울역 선로를 점거했다. 지하철 지연이 발생한다고 전장연의 열차 탑승까지 가로막히는 요즘을 생각하면 훨씬 ‘과격한 시위’였다. 앞서 그해 설날 아들을 만나기 위해 이동하던 장애인 노부부가 경기도 안산에 있는 오이도역에서 리프트를 타다 추락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철도청은 사과도, 재발방지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장애인들이 쇠사슬을 목에 감고 선로를 점거하면서 이동권 투쟁이 분출했다. 장애인도 학교에, 병원에 가고 싶다고.

운동의 결실로 2004년 교통약자법이 제정되면서, 새로 만들어진 지하철역사에는 엘리베이터가 들어섰다. 이후에 만들어진 지하철 9호선이나 수도권 밖 지역의 지하철에서 엘리베이터 문제가 좀체 나오지 않는 이유다. 장애인들의 피와 땀이 만든 지하철 엘리베이터라는 얘기다. 지금은 장애인만이 아니라 거동이 불편한 노인, 어린아이를 태운 유아차, 짐이 많은 여행객까지도 그 혜택을 보고 있다. 오이도역 사고가 일어나고 20여년이 지났지만 서울교통공사가 관리하는 지하철역사 19곳엔 아직 엘리베이터가 없다. 지난해 4월 서울시는 내년까지 모두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2015년엔 2022년까지 모든 역사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은 결과다.

이동권을 포함한 장애인들의 권리 요구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할 만큼 했다”는 게 정부와 서울시의 기조다. 그렇지 않다면 열차를 무정차 통과시키거나 열차 지연이 ‘예상된다’는 것만으로 전장연의 탑승 자체를 가로막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행정당국이 선진국의 장애인 정책 사례나 유엔 장애인권리협약 등을 기준으로 뒤떨어진 우리의 현실을 점검하지 않고, 시민들의 ‘짜증 수치’만을 동력 삼아 ‘법과 원칙’대로 집행했다는 말만 반복하는 것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하철은 1분만 늦어도 큰일”이라며 전장연을 몰아세웠지만, 지난해 1~9월 사이 전장연 시위로 인한 열차 지연은 39일이었지만 차체 결함이나 시스템 장애로 인한 지연 운행은 89일이나 됐다. 지하철 선전전에 기동대 수백명을 투입한 경찰은 서울교통공사 뒤에 숨어 “경찰은 지원할 뿐”이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1974년 1호선이 개통된 이래 서울지하철은 쉼 없이 거미줄처럼 확장됐다. ‘막내 라인’ 격인 8호선은 27년 전인 1996년 개통됐다. 그 20여년간 도시와 교통망을 설계한 ‘비장애인 남성’들에게 ‘장애인’과 ‘유아차’의 접근성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상상력은 없었다. 지난 2일 10시간 넘게 삼각지역에서 지하철 탑승을 거부당한 우정규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는 지나치는 시민들을 향해 말했다. “서울시민 여러분, 지나가는 시민 여러분. 우리가, 지역사회에 있는 모든 이가 지하철을 탈 수 있게 해주십시오. 휠체어가 지하철에서 배제되면 어느 순간 유아차도 배제될 겁니다. 노인도 배제될 겁니다. 그렇게 비장애인만, 건강한 남성만 이동하는 사회가 될 겁니다.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기 위해 우리 함께 지하철 탑시다.”

누구나 시간이 지나면 무릎이 닳고 노인이 된다. 당연한 과학적 사실에 엄청난 상상력이 동원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suj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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