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은의 어떤 날] 스치는 인연에도 소통과 희망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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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바뀌기 전 내가 진행하는 라디오프로그램 <여성시대> 에서는 '도로 위 히어로즈(영웅)' 특집을 했다. 여성시대>
애청자들은 때로는 가까운 사람보다 전혀 낯선 사람 앞에서 오히려 속마음을 털어놓고 위로받은 기억을 많이 보내주셨다.
이게 아닌데, 이건 바라던 바가 아니래도 여울목 있고 크고 작은 바위에 걸리면서 하루하루가 흘러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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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은의 어떤 날]
양희은 | 가수
해 바뀌기 전 내가 진행하는 라디오프로그램 <여성시대>에서는 ‘도로 위 히어로즈(영웅)’ 특집을 했다. 많은 이들이 타고 내리면서 갖가지 다양한 짧은 드라마가 펼쳐지는 1.3평짜리 달리는 공간!!
애청자들은 때로는 가까운 사람보다 전혀 낯선 사람 앞에서 오히려 속마음을 털어놓고 위로받은 기억을 많이 보내주셨다. 울거나, 아프거나, 애태우거나, 아이를 출산하거나, 짐이 너무 많거나, 지쳐 잠들거나, 술주정이 심하거나…. 숱한 이들을 겪어서인지 버스나 택시를 운전하는 기사분들 인생 철학의 깊이도 깊었다. 겪은 만큼이 그 사람이라던데, 이 분들이 하루에 겪는 사람만도 얼마나 많을까 말이다.
#노모와 임산부를 태우고 보건소로 향하다 얼마 못 가고 차 속의 출산을 지켜보게 된 기사는 엉망이 된 카시트 때문에 미안해하는 할머니께 “손주 덕에 제가 부자 되겠어요” 인사했고, 그 뒤 꾸준히 택시운전을 해서 집 사고 삼남매 키우고 손녀까지 태어나 행복하다며 ‘택시 안 출산은 기사가 부자된다’는 설이 있는데 그 말대로 된 것 같다 하셨다.
#아기들 장난감, 거울, 껌, 휴지, 공기청정기까지 가득한 동화나라 같은 택시. 아기들이 좋아하는 걸 보며 아내와 영상통화하는 아빠와 아기들이 타면 주려고 장난감을 가득 채우신다는 기사분께 고마워한 사연과 사진도 좋았다.
#중요한 면접 보러 가는 길 택시 안에서 양해를 구하고 면접 연습하는데, 기사분이 자기를 면접관이라 생각하고 편히 해보라며, 목소리의 떨림과 어~어~ 하는 습관까지 고쳐주시며 용기주셨던 기억이 고마웠다는 사연.
#집 앞 마트에서 달걀을 한판 샀는데 그만 집에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는 할머니는 ‘길 잃으면 무조건 택시타라’는 딸 말대로 택시를 탔고, 기사는 할머니와 길을 되짚어가서 주차한 뒤 할머니가 기억을 되살려 집을 찾아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돌아선 얘기와 함께 “어느 날부터 기억이 조금씩 지워지면 내 집 앞도 낯선 곳으로 변할 수 있다”고 글을 맺어주셨다.
#우울과 불안이 심했고 유난히 세상이 나를 등진 것 같은 어느 날, 한탄하듯 마음을 털어놓으며 어린 날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지낸 얘기며 내게 이런 아버지가 계시면 좋겠다 싶게 뜻깊은 대화를 나누고 내리면서 ‘기사님과 파이팅!’ 하는 영상을 보내준 승객. 힘들 때 부끄러워 말고 당당하게 살라는 응원을 간직하며 자주 그 영상을 본다고 했다.
#가위바위보 게임을 해서 손님이 이기면 간식도 주는 20대 초반의 여성 기사분을 보며 열정적으로 일하는 자세에 가슴 뭉클 감동받았다는 사연도 있었다. 서로 전혀 모르는 남남인데 목적지까지 가는 짧은 사이에 사는 게 무엇인지? 용서와 이해, 소통과 희망을 주고받을 수 있음이 놀라웠다.
이렇게 2022년을 마무리하며 최고로 기분 좋았던 건, 세신사 언니가 기회를 준 일이다. 때미는 일이 무슨 대수라고? 하는 분도 계시겠으나 익숙지 않은 귀한 휴식 같았고, 해 바뀌기 전 꼭 치러야 할 의식이었다. 사이사이 골골이 낀 찌꺼기를 깔끔히 벗겨낸 듯 몸은 물론 마음까지도 찝찝한 것들을 몽땅 처리한 기분에 날아갈 듯 상쾌해졌다.
그러나 남편의 코로나19 확진으로 삼시세끼 수발하느라 바삐 지내며 후유증으로 잔기침이 심하다 할 정도로 계속되더니 꼴딱 밤새우기를 사흘…. 덕분에 덩달아 잠을 설친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졸음 덕에 생방송 도중 혀가 풀린 듯 발음이 새기도 했다. 기침이 계속될 경우 폐렴인지 꼭 확인해보라 해서 엑스레이 찍었더니 폐렴! 어떤 이는 코로나 후유증으로 한달 내지 석달까지도 기침을 했다던데 열은 없고 기침도 심하지 않았지만, 약을 먹는데도 기침은 계속했다.
이 와중에 새해라니? 무슨 정신에 새해 계획을 세울까? 워낙 계획도 없이 닥치는 순서대로 일하는 편이라 어린 날의 동그란 일과표를 만든대도 이런저런 일이 끼어들면 그대로 지켜지기 어렵다. 인생이 뭐 계획대로 되나 말이다.
인생의 강물은 늘 원치 않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이게 아닌데, 이건 바라던 바가 아니래도 여울목 있고 크고 작은 바위에 걸리면서 하루하루가 흘러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있다. 새해 바람으로 애청자들은 건강을 가장 많이 꼽았다. 건강한 몸에 버텨낼 저력과 인내가 보태지면 어떤 일이건 해낼 수 있겠다. 우리 모두 건강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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